광주여고에 다니던 시절에도 재력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원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을 살았다. 우리 가족은 광주 동구에 살았는데 시험을 앞두고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함께 공부하곤 했다. 안방과 대청, 부엌을 지나 가장 안쪽에 있던 내 방은 약 9.9㎡(3평) 남짓한 크기였다. 그 방에는 실내 화장실도 따로 있었다. 당시 대부분 화장실이 주택과 떨어져 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돌아봐도 참 특별한 환경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공부하고 있으면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아주머니가 간식으로 부레떡(인절미)을 직접 만들어 동치미와 함께 내어주셨다. 내 고등학교 시절은 1951년에서 1953년, 한국전쟁 중이었다. 그런 시절에 여고생 대여섯 명 앞에 부레떡과 동치미가 간식으로 차려졌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친구들이 배고픈 줄도 모르고 그저 웃고 떠들던 철없는 아이였다.
그 무렵 학생 교복은 마사(麻絲), 즉 무명천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날 충장로 길을 걷던 나는 중앙나사양복점의 마네킹에 걸려 있는 우단(벨벳)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윤기가 흐르는 그 천을 본 나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버지가 평소 양복을 맞추던 단골 양복점이었다.
“우리 아기씨 왔네.” “저거 얼마예요, 내 교복 만들어줘.”
“아버지도 아직 안 해 입었는데.” “그래도 해줘.”
“아버지한테 허락은 받아야지. 허락받아 오면 해줄게.”
나는 옆에 걸려 있던 검정 벨벳 천을 보고도 말했다. “아저씨 저것도 해줘.”
“아니 하나면 됐지 두 개씩이나?” “하나는 비 올 때 입고 하나는 날씨 좋을 때 입고.”
양복점에서 교복을 맞추고 나왔더니 바로 옆에 구둣가게가 있었다. 대부분이 고무신을 신던 시절 형편이 조금 나은 학생들이 운동화를 신었는데, 나는 구두에 마음이 꽂혔다. 교복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자주색과 검정 구두를 골라 신었다. 당연히 외상이었다.
며칠 뒤 상자에 담긴 교복을 들고 양복점 사장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사람아, 넋 나간 사람아. 120만 환이나 되는, 나도 한 번 못 입어본걸.”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능청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며 “아빠 왜 그래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네 옷 해왔다”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셨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달랐다. 어머니는 구두를 들고 온 심부름꾼이 아버지 눈에 띄지 않도록 얼른 데려가 상황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나는 그 옷을 입고 다음 날 당당하게 학교에 갔다. 학교 규율에 어긋난다며 아버지는 걱정했지만, 선생님들은 오히려 벨벳 교복을 입은 나를 보며 옷자락을 매만지기 바빴다. 육성회장 딸이라는 특혜뿐 아니라 내가 지닌 부와 존재감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광주에서 가장 좋은 것은 늘 내가 먼저 입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지, 그 품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