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입력 2025-04-04 00:32

해마다 부활절이 다가오면 묻게 된다. “그때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면?” 누군가는 말한다. 부활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심리적 각성일 뿐이라고. 또 어떤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다. 성경은 증언한다. 빈 무덤의 주님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로도 살아나셨다고. 그때, 그 자리에 주님은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톨스토이 단편을 보면 신이 인간에게 무병장수를 허락했지만, 오히려 인간은 이기적이고 다투기만 했다. 그래서 신은 죽음을 선물로 줬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마저 타인을 협박하는 무기로 바꿨다고 한다. 이와 달리 누군가는 극단적 선택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한다. 부활은 그런 허망한 죽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인간이 죽음을 애써 의미화한 모든 방식조차 넘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실재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조던은 사랑하는 마리아를 말에 태워 보내며 말한다. “당신이 가면 나도 가는 거야. 이제 당신이 나의 인생을 사는 거야.” 실존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부활도 그러한 사랑의 기억처럼 해석했다. 하지만 부활은 단지 기억이나 상징만은 아니다. 주님은 실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제자들 앞에 서서 “만져 보라”고 하셨다.

물론 자연주의자들은 부활을 부정한다. 이성은 그런 기적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으니 신화라고 한다. 그러나 수학자 존 레녹스는 되묻는다. 자연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법칙에 개입하실 수 없다면, 그게 오히려 비합리적이지 않으냐고. 부활은 자연을 무시한 사건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한 분이 손을 내미신 사건이다.

C S 루이스는 기적을 “자연에 대한 초자연의 간섭”이라 했고, 부활을 단순한 소생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 방식으로의 변형이라 봤다. 무덤에 남겨진 수의는 그분이 풀고 나온 흔적이 아니라 마치 나비가 허물을 벗듯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새로워진 존재 질서로 이동하셨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단지 고난을 기억하는 예전이 아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바뀌던 순간, 이미 존재의 차원이 전환되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의 무게가 아니라 성육신의 몸이 부활의 차원으로 이행되는 신비로운 첫 전조였다. 땀이 핏방울이 되는 변화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고난 속에서 태동했음을 본다. 겟세마네와 골고다, 그리고 빈 무덤은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된 구원의 연속이다. 성육신하신 몸은 부활하신 몸이 되고, 비하(卑下)는 승귀(昇貴)를 예비하며, 낮아짐은 높아짐을 낳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는다.

이러한 부활을 단순한 상징으로 축소하려는 환원주의는, 마치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단지 물감의 조합이라 치부하는 것과 같다. 누가 캔버스 전체를 가득 채운 작은 점들을 화학물질 범벅이라 깎아내릴 수 있는가. 부활도 마찬가지다. 자연과학으로 증명할 순 없지만 물질로 환원할 수도 없는 실재다. 부활은 생명과 사랑, 화해와 진실, 만남과 약속 등 모든 것의 본질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니 부활은 찬란한 진실이다. 고흐가 고단한 붓끝으로 새겨낸 해바라기의 빛처럼 부활은 인간과 세상의 어둠 속에 주님의 고난으로 빚어낸 경이로운 빛이다.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 19:28, 30)

아, 그 부활의 빛 속에 역사의 향방은 이미 확정됐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