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주는 평안

입력 2025-04-03 23:10
‘내일을 위한 힌트’는 2009년 단편소설 ‘제니’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기준영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매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으며, 끝내 다 알지 못할 삶의 신비와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지니고서 더 나아가보겠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라고 적었다. ⓒ해란

2009년 단편소설 ‘제니’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기준영은 그동안 세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이번 소설집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작가가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빛을 좇아 나아간 시기”에 쓴 네 번째 소설집이다. 소설집의 제목 ‘내일을 위한 힌트’의 ‘힌트’는 아무래도 작가의 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소소하게나마 전에 안 해보았던 일들을 시도하고, 새로운 질문을 안고서 낯선 만남의 장으로 들어서기도 하던…그 작은 모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일을 알 수 없어서였다…누군가를 진짜로 만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내게 일어난 놀라운 우연과 필연을 헤아렸다. 스스로와 타인에게 전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고, 그렇게 하지 못했던 날에는 왜 그랬을까를 곰곰이 짚어보았다.”


작가의 이런 자성(自省)을 반영하듯, 주인공들은 불쑥 찾아온 누군가에 선뜻 문을 열어주고, 우연한 만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첫 작품 ‘다미와 종은, 울지 않아요’에서는 소설집 전체의 ‘주제 선율’을 음미할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잠깐 알고 지냈지만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다미와 종은이 잠깐 한집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미는 처음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찾은 종은에게 문을 열어주며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손부터 씻어. 밥은 먹었어?”라고 말을 건넨다. 다미는 “불가해한 혼란을 대할 때의 태도는 살아온 날의 습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텐데, 나는 함몰되지 않고자 차라리 열어버린다”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아무 사이도 아닌” 둘은 종은이 떠나기 전날 밤 “그냥 울게 내버려두라”는 부탁에 말없이 내버려두고, ‘아니’와 ‘응’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사이가 된다.

어쩌면 다미의 수용(受容)과 개방(開放)은 그의 커다란 상실의 경험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겠다. 쌓였던 빚을 모두 청산하고 엄마와 좁은 방 한 칸을 마련했을 때,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주문한 이층 침대가 배달왔던 날 엄마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다미는 그때 다짐 비슷한 걸 했다. ‘이 순간이 나의 다음 순간을 닫아버리는 불치의 행운이나 불운이 아니기를.

좋거나 나쁜 어떠한 알리바이도 되지 않기를. 무한대의 아무 데로나 활짝 열리기를. 자유롭게 흘러가게 되기를. 운명에 발이 묶이기 전에…” 엄마가 쓰려 했던 이층 침대의 빈 한쪽은 종은에게 내주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첫 작품에서 제시한 주제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서는 지방에 사는 숙부가 애인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댄스파티’에 갔다가 다쳐서 병원으로 데려갔을 때 한 남자 그리고 그의 여자와의 우연한 만남이 소재다. 주인공은 “나를 부르는 소리는 내가 귀 기울이는 데서만 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 기원하는 ‘평안’와 ‘평화’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여행은 또 다른 만남이다. ‘신세계에서’는 엄마를 일찍 여의고 아빠 슬하에서 자란 조카 이열음과 고모 이원이 부산으로 떠난 2박 3일의 여행과 그곳에서 김호경이라는 인물과 우연한 만남을 들려준다.

사실 열음은 악연이 있던 친구와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더 큰 상처만 안았다. 그렇게 여행이 끝날 것 같았지만 다음 날 새로운 여행을 약속한다. 메모 습관을 가진 김호경은 다이어리에 ‘나들이, 약속, 맑음’이라고 적는다. 내일을 위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하는 단어들이다. 소설집의 제목은 “기억할 이름들과 ‘내일을 위한 힌트’들을 남겨두었다”는 대목에서 따왔다.

작가는 ‘작가의 말’ 마지막에 “매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으며, 끝내 다 알지 못할 삶의 신비와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지니고서 더 나아가보겠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라고 적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지만 독자들에게 전하는 당부이기도 하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