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용 목사의 스티그마] 이상한 어른들의 세상

입력 2025-04-03 00:31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보면 주인공이 술꾼의 별에 간 이야기가 나온다. 술병이 가득한 곳에 술꾼이 술을 마시고 있다. 어린 왕자가 묻는다. “왜 술을 마시세요.” 술꾼은 답한다. “잊기 위해서지.” 어린 왕자가 “무엇을 잊기 위해서예요”라고 측은한 마음으로 묻자 술꾼은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지”라고 머리를 숙이며 말한다.

어린 왕자는 술꾼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뭐가 부끄러운데요”라고 물어본다. 술꾼은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술을 마시지”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난처해하며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별을 떠난다.

이상한 어른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는 어른들은 타인의 자유 따위는 관심도 없고, 광장을 자기들의 소유인 양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할 자유를 무시하고 침해한다. 또 나라를 구하겠다고 광야로 나와 정치적 구호와 혐오, 거짓 뉴스로 가득 채운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어른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천국을 향한 소망을 광신도들의 저급한 보상 정도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거리로 뛰어나와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는 어른들은 정작 자신들의 권리는 챙기고 싶어하면서 “그럼 당신도 희생하라”는 말에는 불평등한 요구라고 발끈한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정의와 법을 지키라면서 정작 본인들은 법을 어기고 불법적으로 거리를 점령한다. 주변 지역 상권은 다 무너져도 괜찮다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을 외치는 어른들은 어린 왕자가 만난 이상한 술꾼과 다를 바 없다. 자유를 찾겠다고 남의 자유를 빼앗고, 법의 공의를 지키겠다고 시위하면서 공공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어른들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불쌍하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헌법재판소에서 100m 안쪽에 초등학교가 있다. ‘자유를 주겠다, 종교로 나라를 구하겠다, 공의로 법을 바로 세우겠다’ 외치는 어른들이 매일같이 그 학교 주변에서 소리치고 푯말을 들고 다니며 서로 저주한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어요”라고 외치는 어른은 드물다. 이제 그들은 어른임을 포기한 자들 같다.

내일과 미래를 향한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가면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술꾼에게 나라를 맡기지 않아야 하고 이상한 어른들에게 자유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종교를 자기들의 소유로 생각하는 가짜 어른들의 기도와 호소는 이제 믿지 말아야 한다. 정의를 외치면서 정작 그 정의가 자신에게 적용될 때에는 이기적으로 반응하는 위선적인 어른들은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6절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증거한다. 최근 한국사회에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만드는 구호와 어른들의 가식적인 모습이 가득하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와 같다.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삿 21:25) 그러나 어린이를 배려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외침과 실천을 하는 어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막 9:37)이라고 말했고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눅 18:16)고 선포하셨다. 하지만 자가당착에 빠진 술꾼과 같은 일부 어른은 이 땅의 미래인 어린이들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술을 먹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먹는’ 술꾼의 별에 찾아온 이야기는 ‘어린 왕자가 그 별을 떠났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처럼 이 땅의 어린이들도 곧 떠날지 모른다. 어른들은 세속의 술을 끊어야 하고 위선을 버려야 한다. 어른이라는 허울을 벗고 여전히 겸손을 배워야 하는 어린이임을 인정해야 한다. 각자의 교실과 가정으로 돌아가 자유와 정의를 다시 배우고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이웃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의를 위해 자신의 부정은 눈감으려고 하는 ‘이상한 어른들의 세상’을 끝내지 않으면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연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