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31조 투자하는 현대차
오직 관세 장벽만 이유일까
강성 노조와 노동 규제 탓에
국내에선 신규 공장 건설 없어
반시장적 법·제도 계속되면
기업은 해외서 생존 모색한다
오직 관세 장벽만 이유일까
강성 노조와 노동 규제 탓에
국내에선 신규 공장 건설 없어
반시장적 법·제도 계속되면
기업은 해외서 생존 모색한다
토요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향후 4년간 31조원의 미국 현지 투자 계획을 지난주에 발표했다.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에 오늘부터 적용되는 25% 관세에 대한 전략적 대응 사례로 평가되고 있지만, 단지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어쩌면 관세 장벽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강성 노조와 사회의 반(反)대기업 정서, 그리고 반시장적 규제들을 피해 해외로 생산 기지를 옮길 수 있는 명분을 현대차그룹에 줬는지도 모른다. 올해 말 울산 전기차 전용 공장이 완공되기까지 1996년 이후 지난 30년 동안 국내 신규 공장 건설은 전무했으며, 대부분의 국내 투자는 생산설비 확충보다는 개선 그리고 미래 사업을 위한 연구·개발에 집중됐다.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해외 공장 건설은 용이한 현지 시장 공략과 물류 비용 절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파업과 단체행동을 일삼는 강성 노조와 유연한 고용을 불가능케 하는 노동 규제가 더 큰 원인은 아니었을까.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20조4000억원에 이어 올해는 24조3000억원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음에도 현대차그룹의 미국 투자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현대차·기아 노조는 국내 생산시설 확충을 위한 대규모 투자와 대폭적인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노사 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국내에서 노사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연평균 근로 손실 일수는 39.5일로 일본의 197배, 독일의 8배, 미국의 4.4배 수준이다.
하지만 현재 입법 논의 중인 노란봉투법은 노동 쟁의로 발생한 손해에 대한 배상 책임 청구마저 제한하고 있다. 또한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고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춰 악화된 공적연금의 재정건전성을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법정 정년 연장이 최근 연금 개혁과 함께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과 고용 경직성 증가 등을 우려해 반대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년 연장 대신 퇴직 후 재고용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앞서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연금을 수령하는 65세까지 고용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기업이 상황에 맞게 정년 연장, 정년 폐지, 퇴직 후 재고용 중 대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영미권 국가들은 이미 2000년대 초를 전후로 법정 정년을 폐지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해고를 불가능케 하는 노동법과 연공서열 중심의 임금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영미권 국가에서는 정년의 연장이나 폐지가 기업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은 기업이 사전 통지 없이 고용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임의고용 원칙을 기반으로 고용 유연성을, 영국은 성과 중심의 임금 체계를 기반으로 임금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가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도 충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 주주의 이익이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사가 민형사상 책임과 관련된 불확실성에 노출돼 경영 활동이 위축될 소지가 크다. 기업들은 주주들의 단기적인 이익 실현을 위해 소극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혁신을 통해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가 정신이 훼손될 수 있다.
또한 미국과 달리 경영권 방어를 위한 신주인수선택권, 황금낙하산, 황금주, 차등의결권주 등의 수단이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기업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약탈적 경영권 위협에 취약해질 수 있다.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어 해외 기업을 유치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쟁국들과 달리 시장 약자의 권익 보호와 민생 정치를 명분으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관련 제도 일부분을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도입해 포퓰리즘 법안을 만들고, 선한 이름으로 법안을 포장해 법안에 반대하는 세력을 반사회적으로 치부하는 반시장적 상황에서 국내에선 미래를 찾기 힘든 기업들이 해외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울고 싶은 기업들의 뺨을 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