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양은 ‘매화의 고장’이다. 다압면의 광양매화마을은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MSN 선정 ‘멋진 봄 풍경을 볼 수 있는 아시아 23곳’, 디지털 여행플랫폼 아고다의 ‘꽃으로 가득한 국내외 봄꽃 여행지 6선’에 선정되는 등 국내를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25~2026 한국관광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올봄 매화 소식이 늦었다. 평소 매화가 만개할 시기에 맞춰 지난달 7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24회 광양매화축제는 이상기후 여파로 ‘꽃 없는 꽃 축제’로 막을 내렸다. 매화는 축제가 끝난 뒤 3월이 다 지나갈 무렵 화려하게 피어나 상춘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광양매화마을은 한평생 매화밭을 일구며 시를 써온 홍쌍리 명인의 손길과 2000여개 항아리가 살아 숨 쉬는 생명력 넘치는 공간이다. 항아리 안에서는 매실 농축액이 무르익고 있다. 항아리 외에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 촬영지인 초가집 세트와 꽃동산의 정취를 돋우는 팔각정이 그림 같은 풍경을 안겨준다. 일대 매화밭에 만발한 희고 붉은 매화의 꽃물결에 숨이 멎을 듯하다. 마을 앞을 유장히 흐르는 섬진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광양매화마을을 에두르고 있는 쫓비산(537m) 줄기를 따라 매화를 즐겨도 좋다. 쫓비산 이름에는 산의 형태가 ‘쪼삣’하다(뾰쪽하다)는 뜻에서 왔다는 설과 섬진강의 물빛이 ‘쪽빛’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쫓비산 전망대에 서면 매화마을은 물론 섬진강, 지리산 자락에 기댄 경남 하동까지 내다보인다.
쫓비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인 백운산(1216m)에서 망덕포구로 떨어지는 지맥의 꼬리에 있다. 망덕포구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남해와 몸을 섞는 곳이다.
망덕포구에선 정병욱 가옥을 만난다. 윤동주 시인의 친필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견된 고택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해인 1941년 시집을 펴내려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 원고 한 부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이후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그의 모친에게 원고를 맡겼고, 모친은 해방이 될 때까지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겨놨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해상 보도교 ‘별헤는다리’를 건너면 ‘배알도 섬 정원’에 닿는다. 면적 0.8㏊, 높이 25m 규모의 섬이다. 여지도서, 대동여지도 등에는 사도(蛇島)로 표기됐으며 뱀섬이라고 불렸다.
쇠로 된 매화꽃 한 송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구봉산 정상이다. 전망대에 철을 이용해 높이 940㎝ 규모로 매화의 생명력을 표현한 봉수대 조형물이 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광양이란 지명을 얻게 된 것을 상징한다.
전망대 입구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차로 쉽게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 서면 광양 시가지와 광양제철소, 이순신대교, 멀리 여수와 순천까지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일출·일몰 어느 때 가도 황홀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야경도 일품이다.
광양에는 매화를 닮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도 있다.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이다. 세종 때 명재상 황희 등이 그의 조상이다. 시와 문장에 능통했던 그는 29세 되던 1883년 별시 문과 초시에 1등으로 뽑히지만 시험관이 그를 시골 출신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복시를 포기하고 귀향했다. 아버지 뜻에 못 이겨 34세 되던 1888년 식년시 소과인 생원시에 응시, 1등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지만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벼슬에 꿈을 접는다. 구례 만수동에 서재 구안실(苟安室)과 삿갓모양의 정자 일립정(一笠亭)을 지은 뒤 매화나무를 심고 그 옆에 조그마한 우물을 만들어 매천(梅泉)이라 이름 붙인다. 그 매천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후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10여 일 만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태어난 봉강면 서석마을에는 ‘매천헌’이란 생가가 복원돼 있고, 매천 역사공원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묘역에는 황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황현과 큰아들이 누워 있다. 주변에 매화가 활짝 피어 있다.
여행메모
망덕포구 벚굴·광양불고기… 입맛 저격
구봉산 전망대 내년 2월까지 재정비 중
망덕포구 벚굴·광양불고기… 입맛 저격
구봉산 전망대 내년 2월까지 재정비 중
광양매화마을로 바로 가려면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나들목으로 빠져 19번 국도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가면 된다. 마을 앞에 넓은 무료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청매실농원 입장료도 없다.
쫓비산 트레킹 경로로 관동마을-배딩이재-갈미봉-바람재-쫓비산-삼거리-청매실농원이 인기다. 9㎞ 거리에 4시간30분가량 걸린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망덕포구에서 ‘강굴’로도 불리는 벚굴을 맛볼 수 있다. 4월까지 제철이다.
광양읍내에 맛집들이 많다. 얇게 썬 소고기에 양념을 발라 석쇠에 굽는 광양불고기는 널리 알려진 메뉴다. 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망덕포구에서는 집와이어도 체험할 수 있다. 망덕산과 배알도 수변공원을 잇는 898m, 활강 4라인 규모의 ‘섬진강 별빛 스카이’다. 출발대가 있는 망덕산까지는 12인승 모노레일이 운행한다.
구봉산 전망대는 내년 2월 26일까지 재정비 중이어서 전망대 카페는 휴장 중이다. ‘메탈 아트 봉수대’의 야간 아트 조명쇼도 감상할 수 없다.
광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