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한·중 관계 레드라인

입력 2025-04-02 00:37

정치·외교적 의미의 ‘레드라인’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의 기준이다. 국가 간에 설정된 레드라인은 선린우호 관계 유지를 위한 마지노선 역할을 한다. 중국은 외교관계에서 유독 이 표현을 애용한다. 중국의 근본적 이익을 해치는 발언이나 행동에는 레드라인을 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종종 실력행사가 뒤따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4월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대만 문제가 중·미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레드라인”이라며 “대만 독립세력의 분리주의 활동과 외부의 묵인 및 지원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해 11월 페루 리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도 대만 문제와 중국의 민주주의·인권, 제도, 발전권리를 4대 레드라인으로 제시하고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중 국교 정상화도 서로의 레드라인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양국 정부가 1992년 8월 발표한 ‘한·중수교 공동성명’ 제3항은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명시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지금껏 바뀐 적이 없다. 제5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담았다. 이는 시 주석과 2014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도 확인된다. 두 정상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한민족의 염원을 존중하며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실현되기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중국의 한반도 평화통일 지지는 분단극복과 통일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반도가 다른 어떤 국가나 민족도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 없는, 한민족 고유의 땅임을 대내외적으로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중국군이 들어와 북한땅을 장악함으로써 동해 진출로를 확보하려 들 것이라는 우려가 일각에서 나온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의 옛 지방정권으로 규정한 것도 고구려의 옛 땅인 북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음모라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극단적 혐중세력은 최근 이런 우려를 확대재생산하면서 중국을 혐오해야 할 근거로 제시한다. 이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이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중국 고위지도자들의 발언에선 이를 찾기 어렵다.

시 주석은 지난 2월 중국 하얼빈에서 우원식 국회의장과 만났지만,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해 3월 양회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사드 사태 이후 한·중 관계가 경색돼 말을 아낀 것이라면 관계개선과 함께 복원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면 달리 접근해야 한다. 북한은 2023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헌법에 명시된 통일·화해·동족이라는 개념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중국이 북한을 고려해 한반도 정책에 변화를 주려 한다면 엄중히 경고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할 이유도 없다. 중국에만 레드라인이 있는 게 아니다. ‘한반도는 한민족 고유의 영토이고 한민족에 의해 통일돼야 한다’는 건 한국의 레드라인이다.

송세영 베이징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