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 미리 알 수 없기에
무언가 조용히 무너지는 지금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간다
무언가 조용히 무너지는 지금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간다
폼페이는 작지만 번화한 도시였다. 도심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과 목욕탕, 크고 작은 극장과 시장이 있었고 도시 외곽에는 농장이 즐비했다. 땅이 기름져 포도가 잘 자랐으며, 폼페이 사람들이 만든 포도주는 바다 건너 여러 지역에 활발하게 팔려나갔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나폴리만에 살고 싶어하는 부유한 로마 귀족들로 인해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고대 로마인들이 화산의 위험성에 완전히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 휴화산이었던 베수비오 화산의 갑작스러운 폭발을 예견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산 정상 부근에서 조금씩 용암을 분출하는 에트나 화산과 달리 베수비오 화산은 초당 150만t의 화산재와 가스를 33㎞ 상공까지 방출하며 맹렬하게 분출했다. 도시는 순식간에 화산재와 쇄설류에 뒤덮였고, 대피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덧없이 생명을 잃었다.
파국이 완전히 갑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예민한 이들은 화산 폭발을 암시하는 황화수소와 유황 비린내를 미리 맡거나 심상찮은 진동과 연기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재해는 측정하고 해석할 수 있는 과학적인 사실보다는 신의 경고나 자연의 변덕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비’하기보다 복구와 재건에 더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위험을 느꼈더라도 그들은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모든 징후를 가벼운 불편함 정도로 여기면서. 하지만 붕괴는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했듯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한순간에.
얼마 전 도시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난 싱크홀 사진을 봤다. 드론의 시선으로 공중에서 내려다본 프레임 속에는 거칠게 찢겨나간 도로와 뻥 뚫린 누런 구덩이가 보였다. 배관과 전선은 나무뿌리처럼 드러나 있었다. 거대한 짐승이 도시의 일부분을 한 입 물어뜯고는 홀연히 사라진 자국처럼. 이 도시가, 그리고 우리가 발을 딛은 땅이 꽤 공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진은 건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그 땅은 곧 메워질 것이다. 찢겨나간 도로는 다시 포장될 것이고,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그 위를 다시 달릴 것이다. 오늘처럼 화사한 봄날이면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길을 건너고, 나이든 이들과 젊은이들이 거대한 망각 위를 함께 걸어다닐 것이다. 재난에 대한 우리의 망각을 마음 편히 질타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 어딘가에서 파열음이 생기고 위험의 냄새를 맡더라도 하루하루의 일과 노동의 페이스를 늦추는 것은 쉽지 않다. 메워진 구덩이 위를 지나가는 버스에 지친 몸을 실어야 하는 이들이 있고, 식기 전에 음식을 배달하기 위해 오토바이로 그 도로를 달려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위험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조금쯤 옛 폼페이 사람들의 그것을 닮은 것도 같다.
이 구덩이 사진이 그렇듯 가끔 어떤 사진은 우리 세계의 반짝이는 겉면 아래 놓인 취약성과 공허함을 노출한다. 예를 들어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인들(The Americans)’에서 풍요롭고 유쾌한 소비 문화의 이면에서 썩어가는 전후 미국의 모습을 찍었다. 그의 렌즈에 들어온 이들은 모두 어딘가 뒤틀리고 병들어 보인다. 번영이라는 외피 뒤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이상한 냄새를 풍기며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을 보다 보면 도시의 구덩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보면 그저 다시 덮인 땅이지만, 그 안에는 균열과 침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구조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내면일 수도 있다. 싱크홀은 메워졌고, 폼페이의 시간은 멈췄다.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얇은 껍질 아래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한 침식이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무너짐은 언제나 천천히, 그러다 한순간에 찾아온다. 그리고 대개는 이미 충분히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