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창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예쁜 새내기 여자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선생님은 후원회장의 딸인 나를 이미 알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내게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겠니”라고 물으셨다. 선생님의 집은 ‘방죽’이라는 곳이었다. 비유하자면 우리 집이 명동 도심의 한복판일 때 방죽은 거기서 두어 시간은 더 가야 하는 아주 외진 시골 마을이었다.
그때는 버스도 없던 시절이라 혼자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아 친구와 함께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선생님과 남편 되는 분이 우리를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집에 데려간 선생님은 우리에게 맛있는 과자를 내어주시곤 “얘들아 우리 교회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친구와 나는 ‘교회가 뭐지’ 하는 눈빛을 주고받으면서도 선생님 손을 잡고 교회로 향했다.
선생님을 따라 처음 가본 교회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학교 교실처럼 생긴 공간에 또래 친구들이 가득 모여 있었는데 내 기억엔 100명쯤 됐던 것 같다. 교회 부장이었던 선생님이 우리를 ‘새 친구’라고 소개해 주셨고 나는 “2학년입니다”라고 수줍게 인사했다.
그날 설교 말씀의 주제는 다윗 이야기였다. 거대한 골리앗을 상대로 싸운 다윗의 용기 있는 모습이 너무 흥미로워 숨죽여서 집중해 들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말씀은 금세 끝나버렸다. 예배가 마무리될 즈음 모두 함께 찬양을 불렀는데, 그때 부른 찬양은 지금도 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진다. “돌아갑시다. 돌아갑시다. 재미있는 시간은 지나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은 우리를 다시 마을 어귀까지 배웅해 주셨다. 선생님과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찬양을 부르며 걷던 그 시간은 어린 나에게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 이후 매주 주일이면 나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에 갔다. 우리 집안의 일꾼들은 “우리 아가씨는 일요일 아침마다 꼭 어딜 가신다”며 다림질해 놓은 옷을 정성스럽게 챙겨주곤 했다.
종교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줄도 모르셨다. 매주 학교 담임 선생님이 부른다니 별다른 의심 없이 허락해 주셨다. 요즘 말로 ‘딸 바보’였던 아버지다. 아버지는 내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뭔가 하고 있겠지’ 하며 믿고 계셨던 것 같다.
그렇게 매주 주일이면 선생님이 계신 교회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교회가 문을 닫았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된 뒤에는 담임 선생님도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매주 기다리던 시간이 갑자기 사라져버려 마음 한편이 허전하고 서운했다.
더 이상 교회를 갈 수 없게 된 나는 집 근처를 둘러보다가 금남로 인근의 ‘중앙교회’를 발견하면서 새신자로 등록하고 다시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전도로 시작된 믿음은 지금까지도 흔들림 없이 내 삶을 이끄는 등불이 돼주고 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