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로비에 압도적인 스케일의 그림이 걸려 있다. 가로만 5.3m로 크기가 너무 커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다. 자연을 표현한 것 같은데 형태가 희미해 무얼 그린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땅의 오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저 거대한 회화를 그린 화가는 여든을 앞둔 강명희(78) 작가다. ‘잊힌 작가’ 강명희가 돌아왔다. 노익장의 화신처럼 전투하듯 그려온 거대한 회화들을 들고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방문(Visit)’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하는 작가를 지난달 26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서울 소재 국공립미술관 전시는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 2인전 이후 36년 만이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 서울대 회화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설적 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오빠다. 1972년의 10월 유신이 선포되던 그해 봄, 돌연 파리로 떠났다. 같은 대학 응용미술과 출신의 동갑내기 약혼자 임세택과 함께였다. 한 해 해외 유학생 인원 제한이 300명이던 시절이었다. “서양미술을 책을 통해서만 봤어요.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갈구가 있었어요. 정치 분위기도 삼엄했고요. ”
파리 생활 10년이 좀 지난 83년에는 퐁피두센터에서 부부가 2인전을 하는 성과를 올렸다. 현지 비평가 및 시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는데, 초현실주의를 이끈 앙드레 부르통의 제자이자 초현실주의 비평가인 알렌 쥬프라의 추천으로 전시가 성사된 것이다. 여세를 몰아 89년에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2인전으로 이어졌다.
유럽 생활은 성에 차지 않았다. 루브르박물관뿐 아니라 이탈리아까지 가서 르네상스 초기 벽화 등 서양미술사 책에 나오는 명작의 실물을 봤다. 하지만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전통을 버리고 다시 미술의 ABC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94년부터 혼자 저 멀리 몽골의 사막과 초원, 칠레 파타고니아와 남극까지 갔다. 몽골은 8번, 칠레는 6번을 갔다. 40대 초반의 여자가 겁도 없었다.
빙산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빙산이 깨져 천지가 개벽할 듯 어르렁 거리는 소리, 그 소리를 기다렸다가 그리기도 했다. 작품의 스케일이 커진 것은 그때부터다. 자신이 본 것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캔버스는 한없이 커져야 했다. 가로 7m, 세로 4.7m 대작도 탄생했다.
94년부터는 프랑스 중부의 시골 투렌에도 작업실을 마련해 파리와 오가며 작업했다. 그렇게 자연 속으로 더 가까이 갔다. 2007년부터는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던 그는 2020년 터진 전 세계적 코로나로 인해 프랑스가 봉쇄령을 내린 여파로 제주에 오래 머물게 됐다. 한국에서의 전시는 그간 뜸했다. 하지만 2005년 베이징 중국미술관 개인전, 2007년 중국 닝보미술관 및 상해미술관 개인전, 2011년 베이징 횡성미술관 개인전 등 중국에서는 왕성하게 소개됐다. 그러다 마침내 한국의 간판 공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통해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전시 제목 ‘방문’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품 제목에서 딴 것인데, 강명희의 유목적인 삶을 웅변한다. 유목적 삶은 자연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의 캔버스 앞에는 늘 자연이 놓였다. 전율을 느끼게 하는 거대한 자연도 있지만, 프랑스 투렌과 한국의 서귀포 작업실 주변의 푸근한 자연도 있다.
거대한 크기를 감당하기 위해 캔버스 앞에는 공사장에서나 쓰는 비계가 설치돼 있다. 자신이 목격한 자연을 캔버스에 온전히 풀어놓기 위해 붓을 휘두르는 그의 동작은 자못 전투적이다. 대나무 장대 끝에 붓을 매단 자신만의 도구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 어떤 대상을 보고 의식하고 그린다. ‘뚜렌의 벚나무’ ‘아뜰리에’ ‘서광동리에 살면서’ ‘송악산’ 등 작품 제목이 그걸 입증한다. 그럼에도 최종 마무리된 캔버스 화면에서는 그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한 이미지의 단서를 찾는 일이 수수께끼 같다. 대상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뭉개져 있거나 헝클어져 추상화 같다. 마치 특정 계절, 특정 시간의 꽃과 나무, 바다 등 어떤 대상을 목격했을 때의 찰나적 감동을 표현하고자 하면서도, 그 대상이 준 감동의 변하지 않는 요소를 쌓고자 하는 것 같다. 후기 상주의 화가 세잔이 형태의 질서를 추구했다면, 그는 풍경이 주는 기운, 환희, 죽음, 공포 등 보편적 감정과 감동의 근본을 추출해 화폭에 고정시키려는 거 같다. 같은 그림을 길면 7년, 10년씩 그리는 데서 그런 태도가 감지된다.
개인전에는 60년대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60여 년에 걸쳐 제작된 회화 125점을 선보인다. 프랑스, 남극, 인도 등 해외 각지를 다니며 그린 풍경도 있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주 풍경이다. 제주 바다 그림에는 현무암이 많은 특성이 어슴푸레 보이고, 서귀포 작업실 주변 솔밭 풍경에서는 하늘과 대지 사이 푸른 소나무의 이미지가 부유한다. 6월 8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