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유통 플랫폼 ‘발란’이 판매자들에게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채 기업회생을 기습 신청했다. 티메프(티몬+위메프)와 홈플러스 사태의 악몽이 여전한데 명품 이커머스 1위 업체까지 책임 회피 수단으로 기업 회생 제도에 기댄 것으로 더 이상 이 제도의 허점을 방치해선 안 될 시점이 된 듯하다.
발란은 지난달 24일 판매 대금 정산을 미루더니, 31일 갑작스레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투자 유치를 명분 삼아 셀러들을 안심시키다가, 정작 법원의 보전 처분 및 포괄적 금지명령 등에 기대 ‘배째라’ 식 대응으로 돌아선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 결과 1300여 개 입점업체가 졸지에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기업회생은 채무 초과 등으로 도산 위기에 놓인 기업에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최근 사례들은 그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홈플러스는 상거래 채무 일부는 변제하면서, 금융채권은 선택적으로 부도 처리해 투자자들의 원성을 샀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1조원 규모의 상환전환우선주(RCPS) 역시 회수가 불투명해졌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공적 기금마저 위험에 노출된 것이다.
금융당국은 최근 사례들이 회생 신청 직전까지 고의로 미정산 상태를 방치하고, 신속한 보전처분으로 민사집행을 막는 행태는 법의 사각지대를 교묘히 활용하려는 건 아닌지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즉각 지급되어야 할 판매 대금을 회생 채권으로 돌려 법적 유예를 받는 것은 회생제도의 근본 취지와 어긋난다. 이제라도 회생제도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 회생 신청 전 일정 규모 이상의 정산 지연이나 채무 발생 시, 이해관계자에게 사전 통보하고 설명할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동시에 채권자 보호를 위한 긴급 구제 절차와 가이드라인도 마련해야 한다. 법의 보호막을 ‘선택적으로’ 활용해 본업은 유지하면서 채무는 유예하는 방식이 반복된다면, 회생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