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찾아온 추위 속에서 이사를 했다. 오랜 고민과 준비 끝에 마련한 새 보금자리는 금방 익숙해졌지만, 달라진 일상의 풍경은 아직 새롭다. 이곳에서 처음 맞이할 봄은 어떤 빛깔과 내음일지 자못 기대된다. 달력을 넘기고 보니 곧 청명(淸明)이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의 청명은 24절기 중 다섯 번째 절기로 음력 3월, 양력 4월 4~6일 무렵에 든다. 벌써 네 번의 절기가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언 땅속에서 숨죽이며 겨울을 난 들풀 뿌리처럼 내 마음도 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따스한 햇살이 마냥 반갑다. 조만간 집 앞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벚나무도 연분홍 꽃을 한가득 피워낼 것이고, 춘풍에 흩날리는 꽃잎을 잡아보려 양손을 휘적거리며 우스꽝스럽게 걷게 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청명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청명에 날씨가 좋으면 그해 풍년이 들고 좋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으며,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을 해도 좋다고 믿었다. 청명 무렵이면 진달래 화전과 쑥버무리를 만들어 먹는 풍습도 있었다. 논밭의 흙을 고르고 겨우내 상한 집을 고쳤고, 일부 지역에서는 나무를 심기도 했다. 이때 심은 나무를 ‘내 나무’라 해 아이가 자라 혼인할 때 농을 만들어줄 재목으로 쓰였다고 한다. ‘청명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라는 속담처럼 예로부터 청명은 무엇이든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로 여겼다.
선조들이 인정한 복 넘치는 절기라니. 아무렴, 정말로 뭘 해도 잘될 것 같다. 온몸이 설렘으로 간질거리다가도, 세상의 아픈 소식과 소란한 사건들에 마음 한편이 심란해진다. 창밖을 내다봤다. 새 보금자리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한 달. 앙상했던 벚나무 가지에 분홍빛 꽃망울이 움텄다. 하늘에는 푸르고 밝은 기운이 감돈다. 절기의 이름처럼 우리 사는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도 청명해졌으면. 이 계절이 우리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것만 같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