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경제의 선두주자인 이 기업들 가운데 가장 최근 부동산 거래를 성사시킨 기업은 가상자산 거래소 빗썸이다. 31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빗썸은 지난 3월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강남N타워를 수의계약 형태로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가상자산 시장 활황으로 임직원 수가 500명을 넘기면서 사옥을 이전하기로 했다는 게 공식 설명이다. 빗썸은 그간 강남 우량 오피스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2021년 대치동 건물을 1400억원에 매입한 데 이어, 2022년엔 삼성대세빌딩을 현금 16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사옥 확보’라는 게 명분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체 없는 디지털 자본이 ‘강남’이라는 공간을 점유해가는 흐름은 한국 자본주의의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도 평가된다. 1970~80년대 건설자본이, 2000년대 IT 자본이, 그리고 이제는 블록체인 자본이 강남이라는 공간을 통해 국내 상업용 부동산의 중심질서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는 시각이다.
가상자산 업계 1위 두나무도 마찬가지다. 두나무는 2023년 코람코자산신탁이 4300억원을 들여 리츠를 통해 매입한 DF타워(옛 에이플러스에셋타워)에 1000억원을 출자했고, 2024년에는 삼성역 인근 영보·영보2빌딩을 3000억원대에 매입했다. 2021년에 인수한 삼성동 부지에서 신사옥 개발도 준비 중이다. 두나무와 빗썸이 이렇게 최근 5년 동안 매입한 건물은 6곳에 달한다. 모두 강남대로와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일대의 업무지구에 위치한다.
강남의 알짜 빌딩을 가상자산업계가 하나둘씩 가져가는 동안 성수동도 온라인플랫폼의 땅으로 바뀌고 있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으로 출발한 무신사는 성수동 일대에 집중 투자 중이다. 업계에 따르면 무신사가 성수동에 직접 보유 중인 부동산은 4곳, 매장이 입점한 곳은 8곳에 달한다. 이들을 총괄하는 부동산 전담팀도 따로 두고 있다.
무신사의 성수 진입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매입한 곳은 옛 동부자동차서비스 부지(성수동2가 271-22)다. 이 부지는 ‘무신사 캠퍼스 E1’으로 탈바꿈됐고, 현재 인근 ‘무신사 캠퍼스 N1’을 임차해 두 곳을 함께 운영 중이다. 이 건물은 작년 10월 마스턴자산운용이 약 1150억 원에 매입했는데, 무신사는 15년 장기 임차를 약속하고 지분에도 참여했다. 매각 후 재임차(세일앤리스백) 방식의 전형이다. 현재 무신사가 짓고 있는 오피스빌딩들 또한 세일앤리스백 방식으로 유동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무신사 캠퍼스 E2(성수2가 275-89)는 2023년 7월 준공됐다. 성수역 3번 출구 인근 부지(성수2가 315-108)는 ‘무신사 엠프티’라는 브랜드 공간으로 개발돼 같은 해 문을 열었다. 또한 옛 CJ대한통운 부지(성수2가 324-2)에는 8264㎡(약 2500평) 규모의 ‘무신사 스토어 성수’를 2025년 하반기 오픈할 예정이다. 다만 무신사는 부동산 자산 확장 차원에서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무신사 관계자는 “무신사의 본업과 관계없는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신사의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임업체 크래프톤도 성수동의 큰손이다. 2023년 토지 자산에만 3032억원, 지난해에는 76억원을 추가 투자했다. 현재 성수동 일대에 건물 7개를 보유 중이며, 이마트 부지 일원에서는 2027년 준공 목표로 약 2조 원 규모의 복합개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하나의 기업이 집중적인 지역 단위의 개발을 주도하는 것은 드문 사례로 꼽힌다.
본업과 무관한 자산 확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해 말 기준 크래프톤의 투자부동산 자산은 5473억원으로, 전체 유동자산의 10%를 넘는다. 반면 연구개발비 비율은 2022년 21.8%에서 2023년 15.7%로 줄었다. 빗썸은 최근 3년간 부동산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동안 보유 중이던 비트코인은 1419개에서 103개로 줄었다. 줄인 규모는 약 2000억원어치, 현재 시가총액의 절반 수준이다.
본업과 연계된 공간 활용이 뚜렷한 경우도 있다. 게임 콘텐츠처럼 팬 기반이 강한 산업에서는 오프라인 체험 공간, 전시·스토리 연계 시설을 통해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고 고객 접점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업의 과도한 부동산 쇼핑이 본업 경쟁력을 낮추는 것뿐 아니라 임대료를 높이고 시장을 왜곡한다는 지적도 적잖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비트코인처럼 기존 화폐 체계 밖에서 갑작스럽게 큰 자금을 손에 쥔 기업들의 투자가 시장을 비트는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