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가 휩쓸고 간지 엿새째인 31일 낮,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마을 입구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강풍에 연신 재가 날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불길이 휩쓴 마을도 한 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전소됐다. 의성군 옥산면과 경계인 길안면은 우리나라 사과 주산지로 특히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유명해진 만휴정이 있는 곳이다.
만휴정 입구는 출입이 통제돼 있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관람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쓸쓸히 발길을 되돌렸다.
불길은 입장권 발매소와 진입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표지판까지 새카맣게 태운 모습이었다. 동서남북으로 정자를 둘러싼 수목들도 전소돼 아예 흙빛까지 온통 검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계곡을 건너는 다리, 방염포에 둘러싸인 목조건물과 기와지붕은 위풍당당히 정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자 주변에는 소방대원 2명이 배치돼 두 시간마다 동력펌프로 지하수를 이용해 물을 뿌리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동 시민 김태근(66)씨는 “만휴정이 화마속에서도 온전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에서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며 “주변 수목이 소실된 것은 참담하지만,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보존된 것은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묵계리에서 평소 만휴정을 관리해 오던 김유한(74)씨는 “서울에 사는 딸 집에 갔다가 사흘 만에 집에 돌아오니 집과 창고가 모조리 타고 없다”며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건 없지만 만휴정이 무사하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 문신 보백당 김계행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로 길안면 묵계리에 있다. 주변 계곡과 폭포등 산림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정자 건물은 경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고, 2011년 계곡과 폭포 등을 아울러 ‘안동 만휴정 원림’으로 지정됐다. 만휴정은 이번 대형 산불때 불길이 번지기 전 덮어둔 방염포 덕분에 큰 피해를 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