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1) 지역 유지 집안에서 태어나 모자랄 것 없던 어린 시절

입력 2025-04-02 05:06
강영애 목사가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장면. 일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구순의 강 목사는 지금도 서울 서대문구의 들꽃카페에서 매일 커피를 직접 내리며 외로운 이웃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1935년 음력 10월 전북 정읍 태인면의 태인 강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의 집안은 삼 형제 가문으로, 경주 최부자에 견줄 만큼 부유했다. 삼 형제 중 큰할아버지는 곡식 천 석을 거둘 정도의 땅과 재산을 가진 천석꾼이었다.

삼 형제는 태인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웠고 태인역사 옆에는 소방서도 지었다. 그곳에는 설립자인 큰할아버지를 기념하는 상반신 동상도 있었다. 극장을 지어 지역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당시 정읍에서 자산이라면 손꼽히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강씨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 사촌 중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다녀온 분도 있었고 서울에서 공부한 이들도 많았다. 사촌 여럿이 읍장이나 면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전기기술자였고 막내는 서울 소재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일찍이 장사의 길에 들어선 아버지는 내가 한 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광주 동구 금남로에 정착하셨다. 그곳에서 미싱 공장을 차리신 뒤 충장로에 ‘만성상회’라는 잡화 도매상을 열었다. 인부만 해도 열 명이 넘었고 전라도 전역에 물품을 공급하셨다.

내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무렵 광주에 백화점이 들어서자 아버지는 잡화상을 정리하고 정미소(쌀 방앗간)를 운영하기 시작하셨다. 수기동에 있는 정미소 부지는 약 2000평 규모로 창고 건물 세 채에 트럭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아버지는 서울 청량리역 인근에도 쌀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창고를 따로 마련해 두셨다.

그때 나는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청소년 시절 내가 원하면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국민학교였는지 중학교였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날 한 친구가 부모님께 필통을 선물 받았던 일이 떠오른다. 공무원이던 친구의 부모님이 서울 출장을 다녀오신 뒤 사 온 것이었다. 통조림 깡통을 펴서 만든 양철 필통이 흔하던 시절, 친구의 플라스틱 필통은 유난히 탐이 났다. 나는 친구에게 두세 배를 줄 테니 팔라고 졸랐고 결국은 거의 강제로 빼앗다시피 했다.

늘 나를 따르던 친구들과 함께 찾던 분식집의 외상도 아버지께서 갚으셨다. 부유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이 무서울 게 없었다.

재력가였던 아버지가 국민학교의 후원회장을 맡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일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내가 부탁하면 아버지는 친구의 이름과 반을 적어 오라고 하셨고 며칠 뒤 직원을 통해 학교에 조용히 월사금을 대납하시곤 했다.

1935년 출생, 이화여대 법정대 정외과 졸업, 1980년 미국 클레어몬트대 수학, 1983년 협성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1975년 무료야간진료센터 설립, 1989년 인천 세광병원 이사장 역임, 1997~2007년 한누리교회 개척 담임 및 은퇴, 현 들꽃카페 바리스타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