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꽃다운 스물다섯 살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재능을 보여 아역 배우를 했던 그녀는 눈부시게 찬란하고 싱그런 나이에 삶을 등졌다. 그제는 한 전직 국회의원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막다른 골목에서, 벼랑 끝에 서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선택한 것이 죽음이다. 죽으면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이들이 너무 쉽게 목숨을 버린다.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삶을 지탱해 오던 마음속 단단한 끈 하나가 툭 끊어진다. 그것이 명예든 사랑이든 재물이든, 커다란 상실감에 더 이상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출간한 후 유럽 전역에 작품 속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이 잇따랐다. 이 소설을 읽고 자살한 청년들이 2000명을 넘었다. 1974년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유명인이나 평소 선망하거나 존경하던 인물이 자살한 뒤 심리적 동조를 느껴 자살하는 사회적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명명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삶은 회색빛 우울이고 검푸른 고통이다. 하지만 소소한 것에서 위안을 찾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지천에 널려 흔히 볼 수 있는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우리는 지천에 널린 행복을 알지 못한 채 손에 안 잡히는 요행을 찾고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덜 욕망하면 삶은 한결 수월하다. 알베르 카뮈는 1942년 발표한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준다. 그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일이다”고 했다. 정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굴러 내려가는 바위를 어깨에 짊어지고 정상에 오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코린토스의 왕 시시포스. 인간의 삶은 부조리하고 절망적이며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산꼭대기에 돌덩이를 옮기는 형벌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로 삶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나는 행위는 해결책이 아니라 도피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카뮈는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시포스를 마음속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충실히 살라는 얘기다. 바윗돌을 매일 들어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삶은 무미건조하고 힘겹다. 죽음은 가까이 있고 손만 뻗으면 이 모든 허무와 절망, 고통도 끝날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뚜벅뚜벅 살아가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 선구자인 덴마크의 쇠렌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현대인의 자아 상실, 자기 소외의 과정을 절망으로 분석한다. 그는 “기독교적으로 해석한다면 죽음도 역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하물며 지상의 일시적인 고뇌들, 즉 고통 질병 비참 곤란 불운 고역 번민 우수 회한 등은 그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며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말한다. 절망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며 죄에 빠져 있는 상태다. 따라서 인간이 절망을 극복하고 회복과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을 믿고 참된 기독교인으로 신 앞에 서야 한다고 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삶은 진자(시계추)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며 불행의 두 가지 원인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았다.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욕망과 열망이 절망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다.”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은 소소한 순간이다.” 19세기 철학자가 체득한 진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로 다가와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플라톤은 ‘행복론’에서 재산 외모 명예 체력 언변에서 조금은 “부족함을 느끼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지금 내게 없는 것, 잃어버린 것들은 놓아버리자. 자분자족하는 마음만 있다면 인생은 한결 살 만하다. 내가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예수께 붙어 있어야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고 우울해하거나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 것은 죽음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이기도 하다. 예수에게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으면서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듯 모든 근심과 걱정을 그에게 맡긴다면 두려울 게 없다. 인생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예수로 충만하고 행복한 마음이 가득해질 것이다.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사우스이스트크리스천교회 담임목사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저서 ‘삶이 뜻대로 안 될 때’에서 “당신의 방법이 통하지 않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그분의 가지가 돼라.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문제를 만났을 때 죽음을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문제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 때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똑같이 예수를 배신했는데 나중에 두 사람의 삶이 바뀐 것은 무엇을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베드로는 부끄러움을 알고 끝까지 예수를 바라보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가룟유다는 자기를 바라봤다. 스승을 배신한 자기를 바라보면서 아무 해결책이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문제들이 밀려올 때 자기를 바라보면 절망뿐이다. 도망가고 싶고 죽고 싶어진다. 하나님 앞에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가 작아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 하나님 안에서 이기적이고 교만한 내가 죽고 어린아이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성경 속 허무함의 의미
성경은 인간의 유한함과 세상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인간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궁극적인 만족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친다.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고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 사람들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전도서는 다 허무하다고 말한다. 전도서는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이 노년에 쓴 책이다. ‘아가서’는 청년기에, ‘잠언’은 중년기에 쓰였다.
솔로몬은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정욕과 우상숭배로 허비한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무의미하며 하나님만이 인생의 참된 가치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자신의 삶 속에서 허무와 좌절, 실패를 체험한 후에 다시금 하나님 앞에 돌아와 겸손히 무릎 꿇고 아뢰는 고백이며 간증이다. 솔로몬은 지혜 명성 부 모든 것이 해 아래 헛되다고 했다.
행복은 파랑새처럼 찾아다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 사람들이 최고의 부귀 영화 권세 지혜 등 그 어떤 것을 가질지라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이 참된 복(전 12:13~14)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시편은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는 것이 중요함을 노래한다. 특히 유일한 모세의 기도인 시편 90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지를 보여준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 90:3)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밤 시간을 일몰에서 일출까지 3시간씩 네 단위로 나눈 것)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개역한글판)
성경은 또 자살이 명백한 죄라고 규정한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고 한다.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을 ‘버려진 여자아이’로 비유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여아는 강보도 없고 소금도 뿌리지 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피투성이라도 살라 했다.(겔 16:6) 아무리 허무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신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