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 떠오른 美·中 ‘해저케이블 패권 경쟁’

입력 2025-03-31 23:06

최근 미국이 중국발·중국산 해저케이블의 미국 현지 상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규칙 개정에 착수했다. 갈수록 고조되는 미·중 패권 경쟁의 전장이 바닷속에 자리 잡은 수백만 킬로미터의 ‘데이터 혈관’까지 번지는 형국이다. 중국의 해저케이블 훼손 의혹을 둘러싸고 고조되는 긴장감도 수면 아래에서 펼쳐지는 ‘바닷속 전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31일 미국 연방 관보에 따르면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해저케이블 규칙 개정안’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를 지난 13일(현지시간)부터 개시했다. FCC가 해저케이블 규칙에 대한 포괄적 재검토를 진행하는 것은 2001년 이후 24년 만이다.

해저케이블이란 바닷속에 깔려 데이터를 전송하는 초고압 광케이블을 뜻한다. 통신시장 조사기관 텔레지오그래피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전 세계 바다에는 총 570개에 달하는 해저케이블이 깔려 있다. 이렇게 가동 중인 해저케이블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140만㎞가 훌쩍 넘는다. 외교부 경제안보외교센터가 2023년 ‘해저케이블의 경제안보화’ 보고서에서 해저케이블을 “21세기 디지털 인프라의 기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필수적인 통신 인프라다.

과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데이터 통신 인프라는 해저케이블과 인공위성으로 양분됐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이 이뤄지고 대용량 데이터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고 저렴하게 전송할 수 있는 해저케이블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현재는 대륙 간 데이터 사용량의 95% 이상이 해저케이블을 통해 전송된다. 상업적 데이터는 물론 군사적 데이터 역시 해저케이블을 거쳐 전송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최근 각광받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역시 해저케이블이 없이는 구동되기 어렵다.


문제는 해저케이블 업계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확대되면서 미국 등 서방의 ‘정보 탈취’에 대한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케이블 공정 도중 백도어 프로그램을 설치해 데이터를 빼돌리거나 잠수함·연결선을 통한 도청을 시도할 수 있다는 우려다.

본래 과거의 해저케이블은 미국 일본 프랑스 3개 국가가 전체 제조·시공 수요의 90% 이상을 차지한 과점 체제였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디지털 실크로드’를 표방한 중국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사업을 수주하면서 점유율을 확대했다. 이에 미국은 2020년 보조금과 외교 압력 등을 동원해 해저케이블 사업에서 중국 기업의 참여를 배제하는 ‘클린 네트워크 계획’을 발동했다. 수출 제재를 통해 중국 업체를 따돌리려는 노력도 곁들였다.

하지만 공급망 자립에 성공한 중국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제조·시공에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HMN테크놀로지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최초에 화웨이 소속으로 출범해 다른 중국 업체에 인수된 HMN은 2019년 전 세계 시장의 11.4%를 차지하더니 현재는 20%를 바라보는 수준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투자 측면에서는 구글 메타 등 빅테크가 주도하는 미국과 달리 차이나텔레콤을 비롯한 3대 통신사가 선봉에 섰다.

그 결과 미국은 견제 수위를 높여 규칙 개정에 나섰다. FCC는 이번 개정안에서 이미 수출 제재가 적용된 중국계 5개사(차이나모바일, 차이나텔레컴 등)와 중국을 겨냥해 ‘특정 국가 및 기업에 대한 부적격 추정 제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케이블을 미국에 연결하겠다고 허가를 신청하더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전부 부적격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은 여기에 ‘해외 적국(foreign adversary country)’으로 분류되는 위험 국가 소속의 개인·법인에 대해 원천적으로 연결 신청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기존에 설치한 해저케이블의 정보도 3년 주기로 업데이트하도록 의무화하고, 케이블 운영자가 이들 위험 국가의 개인·법인에 회선 등을 임대하는 행위도 금지한다. 해저케이블의 외국 지분 보유자를 공개하는 기준도 ‘10% 이상’에서 ‘5% 이상’으로 낮춰 중국을 비롯한 외국계 투자자를 보다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규칙 개정안은 오는 5월 의견수렴 과정을 마치고 이르면 하반기부터 발효될 전망이다. 개정안은 주로 미국 본토로 새롭게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을 다루고 있어 한국이 당장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일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 중국 등과 미국을 연결하는 NCP(New Cross Pacific) TPE(Trans-Pacific Express) 2개 케이블은 향후 정보 업데이트 과정에서 분쟁에 휘말릴 소지도 있다.

점유율을 둘러싼 분쟁 외에 해저케이블 물리적 훼손 문제도 해저케이블 업계의 새로운 뇌관이다. 최근 들어 중국이 의도적으로 수중 장비를 동원해 국가 간 해저케이블을 절단한다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지난해부터 발트해, 대만 해협 등의 해저케이블 절단 사례가 중국 및 러시아 선박·잠수정이 관여돼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각국 데이터 망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케이블이 예고 없이 작동을 멈추면 인터넷 작동이 멈추고, 금융 혼란 등의 막대한 피해도 발생한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았을 뿐 유난히 해저케이블 절단 사고에 중국 국적 선박들이 많이 관련된 것은 사실”이라면서 “유사한 사건이 이어질 경우 또 다른 미·중 갈등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세종=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