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기독 가치 담은 독립신문·기독신보 세상을 밝히다

입력 2025-04-01 05:09 수정 2025-04-01 06:42
독립신문(왼쪽)은 1896년 5월 30일자 지면에서 백정 출신으로 기독교인이 된 박성춘의 편지(가운데 사진 하단)를 보도했다. 오른쪽 사진은 1915년 장로교 감리교 연합으로 발간하던 기독신보 모습. 국민일보DB

1896년 4월 7일 송재 서재필(1864~1951) 선생은 국내 최초 민간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국민 계몽과 자주 독립을 위해서였다.

신문 창간 배경에는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급진개화파였던 서재필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실패하고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착했던 서재필은 자연스레 서구 근대 사상과 민주주의, 더 나아가 기독교의 가치를 접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이런 취지에 공감해 신문 창간과 발행을 도왔다. 독립신문은 감리교 선교부 삼문출판사에서 인쇄됐다. 신문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 인권 존중, 평등사상 등 기독교 핵심 가치를 반영하며 국민에게 새로운 사상을 전파했다.

독립신문 곳곳에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묻어난다. 신문은 1896년 5월 30일자 지면에서 백정 출신으로 기독교인이 된 박성춘이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여전히 백정을 차별하는 사회적 관습에 대해 관속들에게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도하기도 했다.

1896년 7월 23일자 신문에는 달성회당 예수교인들이 불렀던 애국가를 소개했다. “독립공원 굳게 짓고 태극기를 높이 다세. 상하만민 동심하여 문명례의 일워보세. 하나님께 성심기도 국태평과 민안락을…”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락한 삶을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다.

장로교와 감리교 초대 선교사들 역시 신문 발간을 주도했다.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1897년 2월 2일 ‘죠션크리스도인회보’(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호러스 G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는 1897년 4월 1일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다. 모두 독립신문이 처음 발행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간되기 시작했다.

두 신문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조선 복음화가 목표였고 비기독교인들까지 독자로 상정했다. 신문을 통해 지식과 학문을 널리 전하고 독자들의 생각이 진일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순한글 신문으로 종교 기사 외에도 당시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다뤘다.

채승희 영남신대 역사신학 교수는 31일 국민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와 그릇으로 어려운 한문을 택하지 않고 알기 쉬운 한글을 택했다”며 “한글은 누구나 쉽게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대중적 확장성을 위해 당연히 한글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이 복음 전파의 도구로 한글을 택한 효과는 무엇보다도 문맹 타파와 발전 그리고 더불어 성경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두 신문은 양대 기독 신문으로 성장했다. 당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장로교 감리교 두 교단은 신문을 통합해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했다. 1905년 7월 1일이었다.

그리스도신문 역시 조선이 문명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소망했기에 선교뿐 아니라 일반 사회문제도 폭넓게 다뤘다. 경영진에는 제임스 게일(미 북장로회) 사무엘 무어(미 남장로회) 엘머 케이블·로버트 무스(미 남감리회) 선교사가 참여했다. 1907년 12월 13일 ‘예수교신보’로 제호를 변경하면서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두고 문서선교를 펼쳤으나 1910년 2월 21일 경영상 어려움 등으로 폐간했다.

1910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국권이 침탈됐는데 5년 만에 또 다른 신문이 등장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다시 창간한 ‘기독신보’였다. 당시 일제가 조선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윌라드 크램 선교사 명의로 창간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시절 기독신보는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서울신대 기독교신학연구소의 ‘초창기 한국교회 신문 연구’에 따르면 기독신보 사설 1478건 중 21%인 309건이 사회적 문제를 다뤘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설은 보통 국내 안팎에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해 신문사가 자신의 논조를 담아 밝히는 해설과 주장이다.

이 가운데 사회적 약자 보호, 절제, 가정 등에 관한 사설은 35.6%인 110건으로 집계됐다. 기독신보는 억압적 사회환경이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기독교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사회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최영근 장로회신학대 역사신학 교수는 “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 신앙은 우리나라와 민족을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원하는 복음이었다”라며 “여러 가지 죄악과 사회적 불의에 고통당하는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구원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시작한 기독교 언론은 현재 큰 나무로 자라났다. 국민일보를 비롯해 CBS CTS 등 15곳 매체들이 한국크리스천기자협회 회원사로서 문서선교와 방송선교를 펼치고 있다. 1988년 창간한 기독교 종합일간지 국민일보는 한국교회를 대변하며 성경을 통해 정치·경제·사회·교육·국방·문화 등을 재조명함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의 가치를 구현하고 공의로운 사회 건설에 앞장서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