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바위 깨는 계란

입력 2025-03-31 00:38
신준섭 경제부 차장

먹거리 물가 오르면 민심은
당연히 나빠져… 동맹국
무시하는 미국 도와야 하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는 불가능한 일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속담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일이 꼭 불가능하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4년 전 한국 사회는 급상승한 계란 가격 때문에 6개월가량 긴 시간 동안 홍역을 앓았다. 당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계란 한 판(30개) 가격이 7000원대를 넘어서자 “특단의 각오로 대응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흔하고 약하기 그지없는 계란이 정부를 뒤흔들었다.

이는 먹거리 물가 상승에 흉흉해진 민심이 정권 지지율을 위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계란 소비량 추이를 보면 정부가 ‘그깟 계란’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지 못할 만도 했다. 2013년만 해도 232개였던 한국인 1인당 연간 계란 소비량은 계란 파동 당시 281개로 8년 사이 49개(21.1%)나 늘었다.

수요가 많은 식료품 가격이 올랐다는 점에서 민심 이반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당시 기재부 물가 담당 과장이 내부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알(계란)을 낳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토로했던 일화가 여전히 회자된다.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 유권자 표심 공략 수단으로 고공행진하는 ‘계란 가격’을 적극 활용했다. 계란 가격 상승이 조 바이든 당시 대통령 탓이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가격을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말은 허언이 됐다. 30일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미국의 계란 12개 평균 소매가는 5.897달러(약 8679원)로 6개월 사이 2배 가까이 급등했다. 개당 가격이 700원이 넘는다. 2023년 기준 1인당 287.4개의 계란을 소비하는 미국인들의 가계 부담도 그만큼 급격히 커졌다.

계란 가격 상승은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창궐로 단행한 대규모 살처분이 부른 현상이다. 산란계 수가 늘어야만 해결되는 문제다. 물리적 시간이 걸리다 보니 바위마냥 ‘스트롱맨(Strong Man)’을 자임하는 트럼프 대통령도 속수무책이다. 트럼프 대통령 싱크탱크 출신인 브룩 롤린스 농무부 장관은 수입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며 진화에 나섰다. 그는 지난 20일 언론에 “한국 등에서 더 많은 계란을 수입할 것”이라며 여론을 달랬다.

다만 관세 전쟁 속에 이 말이 갖는 힘은 미약하다. 한국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7일 보도설명 자료를 통해 “국내 수요 증가로 수출용 계란 확보가 어렵다. 추가 수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 검역 기준 때문에 신선란 수출이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한국 외 다른 국가 역시 미국행 계란 수출에 미온적인 상황이 이어지면서 롤린스 장관의 해법은 벽에 부닥쳤다.

사실 한국만 놓고 보면 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관측에 따르면 이달 일일 계란 생산량은 4972만개로 전년 동월보다 170만개(3.5%) 늘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업계를 설득해 수출할 여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가 굳이 ‘무리’를 하지 않고 있는 데는 미국이 먼저 시작한 ‘자국 우선주의’가 녹아 있다는 판단이다. 필자가 봐도 한국 내 물가가 불안한데 동맹마저 헌신짝처럼 버리는 국가에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무기 삼아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에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현대차가 미국에 3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한 다음 날 자동차 관세(25%)를 발표하며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우방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손해를 보며 계란을 미국에 보낼 이유는 없다.

미국이 자초한 이 상황은 그저 계란 가격 하나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자세라면 보다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연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국 정부가 계란 파동 속에서 교훈을 얻기 바란다. 그 정도 가치 판단도 못 한다면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란 명패는 어울리지 않는다.

신준섭 경제부 차장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