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분 비영리 공익재단 소유
기업의 목적 사회적 책임에 두고
막대한 수익 전액 사회 공헌 투자
韓도 기업 자체 적대시하기보다
창출한 가치 사회적 활용 힘써야
기업의 목적 사회적 책임에 두고
막대한 수익 전액 사회 공헌 투자
韓도 기업 자체 적대시하기보다
창출한 가치 사회적 활용 힘써야
170년 넘게 5대에 걸쳐 가족 내부에서 경영권을 승계하며 문어발처럼 다각화된 100여개의 계열사로 국가 경제를 40% 가까이 점유해온 기업이 있다. 우리나라라면 독점 재벌로 낙인찍혀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기업은 전폭적 지지와 사랑을 받아 왔는데, 바로 스웨덴의 국민기업 발렌베리다.
발렌베리는 재벌과 비슷한 기업집단인데 20세기 중반 이래 스웨덴 주식시장의 40%, 산업 고용의 40%, 국내총생산(GDP)의 30% 내외를 차지해 왔다. 발렌베리 계열사는 글로벌 선두권 기업 19개를 비롯해 100여개에 달하며 다양한 산업을 망라하는데 전동의 ABB, 항공기와 자동차의 사브, 통신의 에릭슨, 코로나 백신으로 유명한 아스트라제네카 등 그야말로 막강하다. 비관련 다각화와 장기 가족세습에도 발렌베리가 국민기업이 된 기반은 무엇일까.
금융과 산업의 이중 지배구조
발렌베리그룹은 1857년에 해군사관학교 출신 사업가 앙드레 발렌베리가 ‘기업의 생존 터전은 사회’라는 이념으로 스웨덴 최초의 현대적 상업은행 SEB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해군 견습사관 시절 체류한 미국에서 금융업의 역동성을 목격하고 당시 자금조달에 고초를 겪던 스웨덴 기업들에 국내외에서 조달한 자금을 공급하며 급성장했다.
금융과 산업을 분담하는 이중 지배구조는 2세대에서 크누트와 마르쿠스 발렌베리 형제가 시작했다. 장남 크누트는 SEB은행에서 해외 금융계 인맥을 활용해 스웨덴 기업들에 해외 자금을 조달했는데 1911년에 은행의 기업 소유와 경영이 합법화되면서 다양한 기업을 경영하게 됐다. 그러나 1920년대 은행들이 계열사 부실로 대거 파산하면서 크누트는 금융과 별도로 전문적 기업경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생 마르쿠스에게 부실 계열사 정리를 맡기면서 두 최고경영자가 금융과 산업을 맡아 상호보완적으로 그룹을 경영하는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3세대에서는 야콥이 금융을 마르쿠스 주니어가 산업을 맡아 에릭슨을 인수하는 등 계열사를 늘려나갔고, 5세대인 현재에 이르러서는 야콥과 마르쿠스 발렌베리가 각각 산업과 금융을 맡아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2020년대 중반부터 6세대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진행 중이다.
독특한 경영권 승계
발렌베리그룹은 ‘가족기업의 원칙은 유지하나 최적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경영권 승계 기준을 철저히 지켜 왔다. 창업자 앙드레 발렌베리는 후계자 후보의 조건으로 부모 도움 없이 명문대에서 경영을 공부하며, 해군사관학교에서 애국심과 자기관리를 배우고, 글로벌 기업에서 최첨단 금융역량을 배워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선발된 2명이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SEB 대표로 각각 산업과 금융을 책임지고 함께 그룹을 이끌어 나간다.
원활한 경영권 승계의 기반은 개인이 기업을 소유하지 않는 독특한 지배구조다. 모든 지분을 비영리 공익재단들이 소유하기 때문에 지분에 따라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고 누가 더 뛰어난 자격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발렌베리 가족은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주식을 받지 않고 급여만 받는다. 현 투톱 중 한 명인 야콥 발렌베리는 “우리는 회사의 법적 소유자가 아니고 단지 그것을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세의 기반에는 창업자부터 계승돼온 경영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며 ‘존재하되 나서지 않는다’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익이 아닌 사회적 책임을 추구
발렌베리는 이익이 아닌 사회적 책임이 기업의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막대한 수익은 공익재단들을 통해 전액 사회공헌에 투자된다. 따라서 발렌베리 구성원의 개인 재산은 많지 않다. 인베스터AB 현 회장 야콥 발렌베리의 재산이 50억원 남짓에 불과하다. 대신 발렌베리그룹의 수익은 노벨재단보다 훨씬 큰 공익재단들을 통해 과학기술과 학문 발전 중심으로 적극 투자된다. 이들 공익재단이 발렌베리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데 계열사들은 대부분 1916년에 창업된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가 관리하며, 또 다른 축인 금융은 그룹의 모태인 SEB은행이 담당하고 있다.
각 계열사의 경영은 헤드쿼터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철저하게 전문경영인들이 자율경영을 하도록 하고,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가 장기 성과를 관리한다. 발렌베리 계열사들은 자율적으로 경영하기 때문에 혁신이 활발하다. 예를 들면 전동 분야 글로벌 리더 ABB는 국가별 조직과 사업별 조직 간 절묘한 균형을 추구하는 ABB매트릭스 구조를 창안해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발렌베리 가문이 공익재단들을 통해 100여개 계열사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해온 제도적 기반은 독특한 차등의결권이다.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1938년 발렌베리를 중심으로 한 경영자연합과 노총, 그리고 정부가 노사정 협약의 세계적 모델이 된 살트셰바덴협약을 체결했는데, 그 핵심은 소유주의 기업지배를 인정하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경영수익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는 옵션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결과 발렌베리 재단들이 소유한 주식은 10배 가까운 차등의결권을 보유해 지배권이 보장되며, 대신 수익은 공익재단에 전액 이전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이후 스웨덴은 물론 핀란드와 덴마크 기업들로 확산됐다.
우리나라 지배구조 정책에 주는 교훈
발렌베리의 사례는 우리나라 기업들과 정부에 큰 교훈을 준다. 최근 세계 1위 손톱깎이업체 쓰리세븐, 밀폐용기업체 락앤락, 주방가구업체 한샘 등 우량 기업들이 경영을 포기하거나 매각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최고의 기업 상속세 때문이다. 기업경영을 승계 못하게 하는 데 집착하는 지배구조 정책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기업은 절대빈곤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한 최고의 사회적 도구다. 따라서 과중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기업경영을 포기하면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개인의 부로 환원돼 버리므로 좌파의 주장과도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발렌베리와 북유럽 국가들 예에서 볼 수 있듯 진정한 진보는 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사회 전체를 위해 진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기업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