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제주도의 지인이 귤 한 상자를 보내줬다. 이미 귤 한 상자를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야곰야곰 꺼내 먹던 터라 껍질을 전부 까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어제는 그중 절반을 꺼내 믹서기에 갈아서 귤잼을 만들었다. 흥건한 귤즙이 끈끈한 잼이 될 때까지 커다란 냄비 앞에 서서 계속 저어 줬다. 지루하다면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켜둔 TV를 통해 등 뒤로부터 전달돼 오는 뉴스 속보를 듣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여의도 156개 면적이 잿더미가 됐다는 비보 속에 또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속보를 전해듣다 보니 잼이 서서히 완성돼 가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마주하기에는 속이 너무 타들어가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등을 지고 싶어서 잼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이었을까.
어린 시절 마음을 다스리고 싶을 때마다 문방사우를 문갑에서 꺼내어 붓글씨를 쓰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쓰고 싶은 문구를 찾고 화선지를 접는 동안 나는 마주 앉아 먹을 갈았다. 주로 아버지와 나 사이엔 요구가 발생하고 결례를 초래해 평정심을 잃게 되는 일을 붓글씨 시간이 막아주곤 했다. 나는 먹을 갈 때에 들리는 스윽스윽 소리를 좋아했다. 그 소리를 다 듣고 난 후에, 천천히 획을 그으며 같은 글씨를 여러 번 반복해서 쓰다 보면 지나갈 감정은 잘 지나갔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먹을 갈았던 마음이 자라 지금은 냄비 속에 주걱을 넣고 젓고 있는 것일까. 꾸덕하게 완성된 잼을 식히는 동안 친구가 전달해 준 링크를 클릭해 산불 피해 구호 성금을 소액 보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열탕 소독해 둔 유리병들에 잼을 나눠 담았다. 친구들에게 한 병씩 나눠 줄 생각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나아졌다. 색이 곱고 깔끔한 맛의 귤잼을 식빵에 듬뿍 얹어 점심으로 먹었다. 구례 여행에서 선물로 받아 온 호지차를 우렸다. 찻잔에 따라 한 모금씩 마셨다.
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