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그 꿈은 누구의 꿈인가

입력 2025-03-28 00:35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피프틴'
상업화된 경쟁에 아이들 동원
어른의 욕망 위한 치사한 꼼수
3월 말 방영을 예정한 MBN의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피프틴’이 소란스럽다. 방송을 앞둔 지난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방송이 안 될 경우 아이들과 부모님이 받을 상처가 크다’며 눈물을 흘린 제작진의 읍소도 악화한 여론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모양새다. ‘언더피프틴’은 세계 70여 개국에서 선발된 15세 이하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 59명이 글로벌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소란은 새삼스러운 한편 새삼스럽지 않다. 거칠게 말해 언젠가 한 번은 크게 찾아올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각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 가운데 오디션이나 서바이벌 포맷이 아닌 걸 찾기 어려워졌다. 상업화된 경쟁은 ‘먹고사니즘’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늘 뒤로 밀리기 일쑤던 음악 프로그램 기획, 제작, 편성의 명맥을 그나마 잇게 만들어 준 독 묻은 동아줄이었다. 독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퍼졌다. 극한경쟁 구도를 만들기 위해 더욱 치열한 대결 방식이 필요했고, 그도 부족하다 싶으면 예의 악마의 편집이 등장했다. 코너에 몰린 출연자가 울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꿈을 이루기 위한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끝내 살아남은 이들에게만 비쳤다.

추측건대, 프로그램 기획 단계부터 당장 첫 방송 며칠 전 방영 일정을 조정해야 할 위기에 놓인 지금까지도 아마 제작진과 방송사는 ‘왜 우리만 문제가 되는지’를 온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논란 후 ‘참가자 본인과 보호자의 참여 의사 확인 및 동의를 받았다’라거나 ‘제도의 벽에 방치된 재능과 주체적 열정을 가진 어린 친구들에게 대중 앞에 설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언급만으로도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말들 사이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그 참여 의사는 누구의 참여 의사이고, 그 기회는 누구를 위한 기회인가. 성인이 아닌 15세 이하 청소년, 나아가 만 8세라는 최연소 참가자가 대상일 때 ‘누구’의 의미는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상식의 영역이다.

‘언더피프틴’을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결국 한국 사회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 왔는지에 대한 뼈아픈 바로미터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상품화한다’는 일차적 비판을 넘어서야만 한다. K팝 세계화 덕에 세계 곳곳에서 전해지는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을 굳이 퍼다 나를 것도 없다. 이번 논란의 뿌리는 한국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례적으로 빠른 발전 속 곳곳이 불균형해진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순이다.

오랫동안 ‘대학 들어가면 뭐든 할 수 있다’며 사회적 정상성을 이루기 위한 유예기간 취급을 받던 한국의 아이들은 불과 20, 30년 사이 잠시라도 삐끗하면 다시는 본경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가 도사린 지뢰밭을 깨금발로 지나가는 신세가 됐다. 아직 성장기에 놓인 이들은 말랑말랑한 스펀지처럼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어른들의 생각을 쉽게 흡수하고 내재화한다. 세상 모든 게 그렇듯 나쁜 것이 더 자극적이고 빠르게 퍼진다. 아이들의 두려움은 대체로 어른들의 불안으로 증폭된다. 나를 무한으로 보호하고 지지해 주는 이를 실망하게 하는 상상은 때로 인간 본성에 새겨진 태생적 두려움보다 더 크게 영혼을 잡아먹는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신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건 어쩌면 행운에 가까운 일일 테다. 그러나 그 과정을 시청자로 불리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공개하고 A부터 Z까지 평가받아야만 한다면, 이건 또 다른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의 꿈’과 ‘기회’를 앞장서 외치는 건 욕망을 숨기려는 어른들의 치사한 꼼수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거나 ‘세태를 반영한다’는 핑계를 대는 사이 ‘언더나인틴’이 ‘언더피프틴’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한다. 그 기회는 누구를 위한 기회이며, 그 꿈은 누구의 꿈인가.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