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오렌지주스 한 잔

입력 2025-03-28 00:32

세상이 달라졌다고 체감한 두 번의 기점이 있다. 우선 2016년 김영란법 도입 당시. 밥값 3만원만 부각됐지만, 그간 정과 관행이란 미명하에 오가던 것이 공직자를 향한 청탁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한 계기가 됐다. 또 하나는 Z세대(1997년 이후 출생)의 등장이다. 그들은 부당한 인격 모독과 갑질을 참지 않고, 위계 서열을 거부한다.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들러붙어 있던 ‘꼰대 문화’를 뿌리째 흔들었다.

두 번의 변혁과 더불어 사회 전반의 감수성이 짙어지면서 탄생한 신조어는 ‘화이트 불편러’다. 고착된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회 진보를 이끌어낸다. 방송 촬영에 동원되는 동물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거나, 간호계의 고질병이었던 ‘태움’을 거부한 간호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불편의 정도가 심화하면 화이트 불편러는 쉽게 ‘프로 불편러’가 된다. 프로 불편러는 보편 상식에 비춰봤을 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에도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묻는다. 과도한 불편이 일상화된 시대, 우리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생 일궈놓은 경력과 성과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권력자나 공인만 조심해야 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인터넷을 통해 개인 누구나 시대착오적 인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불편이 자리잡으니 그나마 남아 있던 한줌의 관용도 사라졌다.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 ‘관용을 위협하는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관용 자체가 무너진다’는 정치철학가 칼 포퍼의 경고 자체가 무색할 지경이다.

경쟁이 체화되고, 먹고살기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악바리가 되어가고 있다. 화를 꾹꾹 참았다가 현실과 인터넷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터뜨린다. 그 분노의 화살에 맞는 건 비단 연예인뿐이 아니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사람들의 다툼도 너무 익숙하다. 이대로 가다간 한국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붕괴되는 것 아닐까 우려스럽다.

매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2018년 개봉한 ‘쓰리 빌보드’다. 딸을 살인한 범인이 수년간 잡히지 않자 어머니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도발적인 광고를 싣는다. 경찰의 무능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암 말기였던 서장은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장을 존경했던 후배 경찰관은 해당 광고를 실어준 광고업자를 찾아가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이 사건으로 해임된 그는 밤중에 몰래 경찰서에 잠입해 추억에 빠진다. 그 순간 딸을 잃은 어머니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다. 경찰관은 큰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온몸이 타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가 눈을 뜨자 붕대 사이로 옆병상의 환자가 보였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흠씬 두들겨 팬 그 광고업자였다. 업자는 자신을 폭행한 경찰관임을 한번에 알아본다. 그는 옆병상으로 한발한발 다가온다. 쿵쿵쿵쿵… 지켜보는 관객의 심장도 뛴다. 그러나 업자는 벌벌 떠는 경찰관에게 복수를 하는 대신, 오렌지주스에 빨대를 꽂아 그의 머리맡에 놓아준다. 반복되는 분노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경찰관은 깨달음을 얻고, 딸을 잃은 어머니의 울분도 십분 이해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며 끝난다.

현실과 영화는 분명 다를 것이다. 다만 상대방 잘못을 이해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실종된 현실에서 오렌지주스 한 잔에 담긴 그 마음이 고맙고 소중하다. 넘치던 한국인의 정을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데 악용한 일부 권력자 탓에 훼손된 관용의 가치를 어떻게 다시 회복해야 할까. 나라가 더 갈라지기 전에 지도층이 앞서서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