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트럼프는 진정 중국 견제를 원하는 걸까

입력 2025-03-28 00:33

한국 우파에 희망 안긴 VOA
中에 자유·인권 전파했는데
트럼프, 좌파 매체라며 해체

대중 전략·보안 조직도 폐쇄
패권 전쟁서 中 이기겠다더니
결국 미·중 짬짜미가 되나

탄핵 정국이 시작된 지난해 12월 중순 미국의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한국 탄핵 상황을 영향력 강화 기회로 볼 것”이라고 말했다. 리처드 롤리스 전 미 국방부 아태안보부차관도 해당 매체에 나와 “(정권이 바뀐다면)한국 진보 정권이 대북정책 전환을 위해 (중국과 손잡고) 동맹을 희생시킬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매체는 ‘미국의 소리(VOA·Voice Of America)’ 방송. VOA는 미 조야의 찬탄 세력에 대한 비판, 반중적 시각을 가감없이 전했다. 국내 우파 진영은 VOA 뉴스와 인터뷰를 적극 퍼날랐다. VOA 보도를 혐중 정서의 논리적 근거로 포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우파에서 싹튼 계기였다.

하지만 지금 VOA 한국어 방송은 업데이트가 중단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2주 전 행정명령으로 글로벌미디어국(USAGM) 산하 VOA, 자유아시아방송(RFA) 등을 사실상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들었지만 VOA가 ‘급진적인 반정부·극좌 선전 매체’라고 언급, 정부 비판 논조에 대한 보복성 조치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우파의 희망이 좌파 소굴로 낙인찍혔다.

미국이 중국과 첨단 기술, 군사력 등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가장 우월한 대중 경쟁력은 자유 언론이다.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Voice)는 권위주의 체제를 흔들기 때문이다. 2차대전 중 설립된 VOA는 미국식 민주주의 전파의 산실이었다. 나치 독일, 소련 등 동구 공산권을 거쳐 1980년대 이후 중국 내부에도 목소리의 반향은 커져갔다. 89년 VOA는 중국군이 천안문 광장의 시위를 무력 진압한 ‘천안문 사태’를 속보로 전했다. 당시 3억명의 중국 청취자들에게 중국어 뉴스를 하루 11시간 내보냈다. RFA는 중 당국의 신장-위구르족에 대한 탄압, 코로나19 은폐 사실을 보도했다.

눈엣가시였던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힘을 잃으니 중국은 쾌재를 부른다. 중국 공산당 대변지 글로벌타임스는 “‘자유의 등불’이라던 VOA가 자국 정부에 의해 더러운 헝겊처럼 버려졌다”고 조롱했다. 그런데 언론만이 아니라 대중 억제 기구들도 트럼프 취임 후 공교롭게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국방부 싱크탱크인 총괄평가국(ONA)은 미국과 경쟁국들의 군사 전력·전략을 분석하고 미래 전쟁의 흐름을 예견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군사비 과잉 지출을 유도하는 전략 제시로 소련의 몰락을 이끌어 ‘냉전에서 이긴 사무실’로도 불린다. 중국 대상 전략 수립에 한창이던 ONA는 최근 문을 닫았다. 중국 해킹 등에 대응할 사이버보안 담당인 국토안보부의 사이버안전점검위원회도 폐지됐다.

트럼프 2기의 대외 목표 1순위는 ‘대중 견제’로 다들 알고 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서두르는 것도 중국에 집중하자는 차원으로 여겼다. 취임 후 두 달여 지났는데 상황이 묘해졌다. 경제 분야만 해도 그렇다. 트럼프 관세의 핵심 타깃은 중국이라 봤지만 우방인 캐나다, 멕시코, 유럽연합(EU)이 더 자주 피해 목록에 올랐다. 동맹 한국, 일본이 역대급 투자 선물을 내놓아도 자동차, 상호 관세 폭탄을 피해가지 못한다. 중국에도 ‘추가 20%’ 관세 인상 발표가 있긴 했으나 대선에서의 ‘60% 관세’ 공약에 비하면 감질나는 수준이다. 철저히 대비한 맞수에겐 가벼운 잽을, 무방비 절친에겐 강펀치를 날리고 있다.

이쯤되면 중국과의 패권 경쟁 승리에 올인한다는 트럼프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세계가 목도한 대로 트럼프의 관심은 오직 미국의 이익, 부의 확대에만 꽂혀 있다. 중국과 적절히 타협하는 게 미국에 재정적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가뜩이나 자유, 타협, 민주의 가치를 거추장스러워 하고 권위주의적 스트롱맨과의 직거래를 선호하는 그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손잡는 건 시간문제일 수 있다.

이 경우 미국의 대중 견제 전략에 맞춘 우리의 외교·안보·산업 정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트럼프는 장기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처럼 미 대통령의 즉흥적 행보에 대한 대비에 소홀해선 안 된다. 럭비공이 어디로 튀든 이를 받아낼 넓고 다변화된 외교력이 중요해졌다. 언제든 친구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국이 일깨워줬기에 우리도 유연한 친구 관리 필요성이 커졌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