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났다. 방과 후 마루에 책가방을 내려놓다가 얼핏 헛간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를 보았다. 그 순간 불길이 높이 치솟았다. 동생이 겁에 질린 채 서 있었다. 새빨간 불길이 볏단을 태우며 세차게 번져나갔다. 나는 허둥지둥 수돗가로 달려가 바가지로 물을 펐다. 하필이면 집에 부모님도 안 계셨다. 이대로 가다가는 헛간과 면한 옆집으로 불길이 옮겨붙을 판이었다. 그때 동네 어른들이 하나둘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앞집, 옆집 할 것 없이 양동이를 들고 와 헛간에 물을 끼얹었다. 천장까지 벋쳐오르던 불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불길이 잡혔다. 그제야 맥이 탁 풀리고 다리가 떨렸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동생이 호기심이 들어 지푸라기에 불을 붙였다가 그 사달을 낸 것이다. 어린 동생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는 호되게 혼났다. 천장까지 시커멓게 그을린 헛간. 무럭무럭 피어오르던 매운 연기와 탄내. 그리고 질퍽한 마당에 어지럽게 찍혔던 무수한 발자국을 기억한다. 그 발자국이 아니었다면 우리 집은 전소되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더 큰불로 번졌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나는 지금도 큰불을 보면 불안하고 두렵다. 생존과 직결된 망실의 기억을 어찌 어린 시절의 일화쯤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연달아 산불 소식이 들려온다. 누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 했던가. 매년 되풀이되는 산불 소식에 시름이 깊어진다. 이마저 반짝 뉴스거리가 되었다가 금세 잊힌다. 그러나 지금도 위험천만한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이 있다. 대피소로 몸을 피한 이재민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산불 규모가 커서 피해 복구도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불이 지나간 자리에 새순이 올라오듯이, 재난 피해자들의 삶을 보듬고 재건하는 일도 우리의 몫임을 안다. 우리의 내면에 새겨진 무수한 발자국처럼 공동체의 힘을 믿는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