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서문’ 무선개정판이 나왔다. 초판이 나오고 10년 만에 나온 이 책은 선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사시를 소개하는 전반부는 실낙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후반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다. 예전에 썼던 역자 후기에서 “잘 안 읽히면 바로 후반부로 넘어가 독서 하라”고 권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다시 펼쳤다. 전반부는 실낙원 이해에 꼭 필요할 부분일 뿐 아니라 분량과 서술방식도 간결하고 절제돼 있었다. 서사시에 대한 설명이 장황했다는 인상은 번역에 공들이는 과정에서 남겨진 기억의 왜곡인지 모르겠으나 꽤 과장된 것이었다. 거기 담긴 모든 문장과 내용을 다 이해하겠다는 부담을 떨치고 줄거리를 파악한다는 마음으로 따라가면 전반부도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CS 루이스가 책을 시작하며 제시한 일화는 앞으로 이 책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는 “서정시를 읽을 때 익숙한 방식으로”, 즉 “좋은 시구를 찾는” 식으로 서사시를 읽으려다 실패한 한 독자의 흔적이 담긴 실낙원 헌책을 소개한다. 이 일화는 서사시란 양식에 대한 이해가 ‘실낙원 서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것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론 독서에서 내가 막연히 기대하는 바와 기대해야 할 바를 구분해야 함도 상기시켜줬다.
책의 본론인 후반부는 내 기억을 되살렸다. 루이스다운 기독교 서적을 기대하고 책을 펼치는 독자에게 미소와 기쁨을 안겨줄 대목이 가득하다. 사탄에 관한 설명과 지옥에 떨어진 악마들이 보여주는 여러 대응방식, 선악과를 먹은 하와와 아담이 지은 죄의 본질에 대한 설명…. ‘하와가 선악과를 건넸을 때 아담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란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은 ‘선악과 시험’이 먼 옛날 신화적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내 문제로 다가오게 한다.
‘너무 전문적이다’ ‘문턱이 높다’는 염려는 접어도 좋다. 실낙원이란 탁월한 문학작품을 매개로 한 책은 지혜를 한가득 전해주고 곳곳에 현대인의 통념을 재고하게 해준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읽으시길.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믿음으로 읽어나가다 보면 이내 읽는 보람을 풍성히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