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통곡이 내전을 끝내다

입력 2025-03-28 00:34

비상계엄 선포 자체도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이후 벌어지는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하다. 나라는 둘로 갈라져 내전과도 같은 혼란에 빠진 듯하다. 서로를 마치 악마처럼 몰아세우며, 상대가 사라져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것처럼 극단적인 적대감이 팽배해 있다. 설령 어느 한 편이 승리를 거둔다 해도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분노의 응어리는 한(恨)이 돼 언젠가 다시금 폭발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해답의 실마리를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12지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내전의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사사기 19장부터 21장의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11지파 간 전쟁 이야기다. 이는 베냐민 땅 기브아에서 벌어진 끔찍한 패륜 사건을 계기로, 11지파가 범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갈등은 결국 전면전으로 치달았고, 세 차례 치열한 전투 끝에 연합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대가는 참혹했다. 연합군은 4만명의 전사자를 냈고, 베냐민 지파는 겨우 600명만이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 진영에서는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이들은 승리를 기뻐하는 대신 오히려 울부짖으며 통곡한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가.” 정의를 세웠다고 자부할 수 있었던 이들이 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을까? 첫째, 이는 회개의 눈물이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자신들 또한 베냐민과 다를 바 없는 죄악에 물들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음란과 살인, 폭력은 베냐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죄는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었고, 이들은 그 사실에 눈감은 채 정의의 사도인 양 행동했다. 심지어 자기 안의 악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향한 분노를 정당화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혼란 역시 단지 무능하고 이기적인 소수 집권세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법 기술자들의 암묵적 카르텔, 선동적인 정치 유튜버들과 이를 증폭시키는 알고리즘, 능력주의에서 밀려난 서민들의 분노와 무력감, 양 진영의 극단적 대립으로 마비된 정치 구조 등 복합적인 악이 얽혀 있다. 예수의 겸손과 자기희생은 사라지고, 자아 과잉과 독선에 빠진 일부 목회자의 이기심마저 이 사태에 일조하고 있다. 과연 나는 떳떳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지금 이 사태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드러난 것이다.

둘째, 긍휼의 눈물이다. 전장에서 쓰러진 아군의 죽음을 떠올리면 억울함이 치밀고, 패잔병으로 남은 베냐민 사람들을 보면 연민이 밀려온다. 싸울 때는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보니 그들은 두려움에 떠는 몇 안 되는 패잔병일 뿐이다. 그들은 멸절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하늘의 유업을 함께 나눌 ‘형제’였던 것이다.

오늘 거리로 나선 이들도 거대한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공산주의와 가난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어르신들, 무거운 경제적 짐을 진 채 조기 퇴직 이후의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는 중년들, 불안정한 일자리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청년들. 이들 모두가 시대의 고통을 짊어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 내전에서 모두가 패배했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가 승리했다. 고통과 통곡 속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통합했고, 참된 정의와 형제 사랑의 가치를 배웠다. 우리의 공동체도 그와 같은 통합과 회복을 꿈꿀 수 있을까. 시작은 정직한 자기 성찰과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다. 모든 변화는 눈물로부터 시작된다.

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