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상하이와 낭트, 그리고 선교 140주년

입력 2025-03-29 00:31 수정 2025-03-31 15:22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조선 왕조를 지나 짧았던 대한제국의 끝자락에 섰던 이들은 만세운동 후 41일 만에 해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조계지가 있던 그 시절 상하이에서는 일본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과연 어디에 모여 망명정부를 구상했을까.’ 오랜 궁금증이었다. 역사학계에선 1914년 창립한 상하이한인교회를 지목해 왔는데 유독 1919년 그 교회가 어디에 있었는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국민일보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현지 취재를 통해 묵은 난제를 풀었다.

1919년 상하이한인교회 주소는 ‘베이징루 18호’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학자들은 이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지목하지 못했다. 막연히 프랑스 조계지 어딘가에 있었을 거로 추정할 뿐이었다.

취재 결과 베이징루 18호는 현재 ‘베이징동루 280호’로 그곳에는 20세기 초 미국북장로교 출판사인 ‘미화서관’이 있었다. 영국과 미국이 공동 관리하던 국제조계에 속한 곳이었다. 상하이한인교회는 이 출판사 마당에 있던 ‘로리기념교회’에 깃들어 있었다.

미화서관은 중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형 출판사였고 그 뒤엔 미국이 있었다. 일본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곳, 독립운동가들에겐 최적의 공간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상하이한인교회는 돌연 이곳을 떠나 1921년 옌안루 삼일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가보훈부와 역사학계 등은 3·1운동 이후 한인들이 상하이로 대거 이주하면서 교인 수가 늘어 예배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해 왔지만 여러 면에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미화서관은 1920년대 말 철거됐고 1931년 그 자리에 중국 염업은행이 7층 높이의 석조건물을 세웠다.

최근 상하이를 답사했던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가 긴 세월 잘려 있던 고리를 이었다. ‘기독교사상’ 4월호 기고문에서 김 교수는 “1924년 세워진 상하이 ‘연합선교빌딩’ 건축을 위해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미화서관을 매각한 대금을 기부했다는 사실을 현지 매체 보도를 통해 확인했다”면서 “미화서관 매각이 상하이한인교회를 이전한 이유였다”고 밝혔다.

6층 높이의 연합선교빌딩은 중국기독교협진회(NCC)와 여러 선교단체 사무실이 입주해 있던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김 교수는 “상하이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산은 종교시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선교와 출판, 교육, 체육, 한인들의 독립운동까지 연결돼 있다”면서 “미화서관의 매각 기금을 연합선교빌딩에 기증했다는 내용 등은 당시 선교역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역사가 자신의 속내를 꺼내 놓기 위해선 이처럼 시간이 필요하다. 1885년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의 입국 이후 140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사료가 발굴됐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드루대 감리교사료실이나 필라델피아 장로교사료보관소 등에 있는 한국 관련 사료 중엔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것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최근 만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프랑스 낭트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 공사관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정부 요인, 상하이 거주 주요 한인들의 동향을 본국에 일일이 보고했는데 그 사료가 낭트에 있는 프랑스 외무부 외교문서 보관소에 있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격변기 우리 역사의 조각들이 1만㎞나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이 심장을 뛰게 했다.

선교 140주년의 해를 기념하며 예배와 세미나 등이 줄지어 열린다. 행사에만 그치는 기념은 늘 공허하다. 독립운동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국교회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연구와 신진 학자 지원 등의 장기 사업들이 기념의 해에 시작되길 기대해 본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