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내 인생은 해피엔딩

입력 2025-03-29 00:32

명작은 그 전개와 결말을 알고서도 다시 찾아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내가 거듭해 보는 드라마는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다. 주인공 배종옥은 현모양처로, 그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남편은 김상중이다. 김상중은 대학 교수씩이나 되면서 아내의 친구인 김희애와 눈이 맞아 딴살림을 차린다.

친구에게 남편을 빼앗기고도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배종옥을 대신해 친언니인 하유미가 두 팔을 걷어붙인다. 김희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눈퉁이를 시퍼렇게 만들고, 그걸로도 성이 풀리지 않아 둘러메치기까지 한다. 교양 좀 차리라는 김희애의 말에 “교오야앙? 나는 이게 내 교양이다!”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넘어뜨리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백미다.

하유미의 통쾌한 연기를 볼 때면 엄마가 떠오른다. 큰언니 아파트 세입자가 집을 잔뜩 훼손해 놓고 아무런 배상 없이 이사를 가려 할 때 부동산을 뒤엎은 사람이 우리 엄마다. 내가 상사에게 시달려 깊은 우울함에 잠겼을 때도 직장으로 쫓아와 혼쭐을 내주겠다는 걸 발목을 잡고 말렸다.

엄마의 뒤끝은 끝이 없어서 그들을 향한 악담을 두고두고 퍼붓는다. 악담이 모이고 모이면 그 사람이 잘될 리 없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다. 하지만 엄마의 악담은 그다지 효험이 없을 듯싶다. 인생은 드라마와 달라 권선징악이 늘 적용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의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그건 삶을 살며 누구나 겪는 불행일 테다.

엄마가 하유미라면 나는 배종옥이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손해를 보고 넘어간다. 그깟 손해 좀 보면 어떤가 싶어서다. 의심이 되는 일이 있어도 굳이 들추지 않는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올 초에도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았지만,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이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아 배종옥처럼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다만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관계로 악담을 퍼붓기는 했다. 그 사람이 하는 일마다 꼬이라고, 그 사람의 지인들이 그를 미워하라고, 그 사람이 돈을 버는 족족 몽땅 새 나가라고, 평생 그 모양 그 꼴로 살다가 망해 버리라고. 물론 나 혼자,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말이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 효과는 어쩜 이리 느릴까. 2025년의 일사분기를 그 사람 악담하는 데 몽땅 쏟아부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약발 하나는 확실해 처음보다 악담하는 빈도가 뜸해지기는 했다. 낮 동안 정신없이 일할 적에는 그 사람 생각이 단 한 번도 나지 않기도 한다. 그 사람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어김없이 나쁜 마음이 들고야 만다. 그럴 때면 연기 연습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대사를 중얼중얼 왼다. ‘하는 일마다 꼬여라. 돈 버는 족족 몽땅 새 나가라. 평생 그 모양 그 꼴로 살다가 망해 버려라!’

지난밤 퇴근길에도 그 사람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주먹을 불끈 쥐며 습관처럼 그 대사를 외려고 하는데, 골백번도 더 왼 대사라 줄줄이 나오는 게 당연지사인데, 어째서인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신 새로운 대사가 떠올랐다. 내가 왜 타인의 불행을 비는 데 인생을 허비하고 있을까.

아깝다. 참 아깝다, 내 인생이. 차라리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빌어주자. 불행을 빈다고 불행해지지 않는 것처럼, 행복을 빈다고 그 사람이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행불행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있는 힘껏 행복을 빌어 주자.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의 대본을 행복한 단어로 채우기 위해서.

주인공의 심리가 긍정적으로 변하면 드라마에서는 그에 걸맞은 상황이 연출된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고, 주인공은 희망에 가득 찬 얼굴로 거리를 걸어 미남을 만나러 간다. 심지어 그 미남은 지고지순하기까지 해서 주인공의 상처가 회복될 때까지 손 한 번 잡지 않고 곁을 지키기만 한다.

하지만 내 인생은 어제와 다름이 없다. 거리를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사무실이고, 사무실을 둘러보아도 미남은 없고, 자리에 앉으니 할 일은 태산이다. 그렇다고 좌절할쏘냐! 헤드폰을 쓰고 희망찬 노래를 내 손으로 틀었다. ‘나’라는 드라마의 작가이자 연출자는 다름 아닌 나다. 내 인생은 누가 뭐래도 해피 엔딩이다.

이주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