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국가에서 운전하다 보면 ‘블라인드 서밋(Blind Summit)’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이 표지판은 차량이 언덕을 오를 때 정상에 이르기 전에는 언덕의 정상이나 그 너머의 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알려주면서 속도를 줄여서 주의해 운전하도록 유도합니다.
요즘 우리는 거의 매일 이 표지판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매일 블라인드 서밋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함과 답답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보이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상황 때문에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대면한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에 근거한 자신들의 마음과 판단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실패로 여기고 실망과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에는 어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능성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등지고 제 살길을 찾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제자들이 판단했던 것처럼 실패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혹한 고통의 상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증거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는 결코 긍정적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고 행동할 때 돌이킬 수 없는 경계를 넘어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느낌과 판단에 이끌렸습니다. 그래서 나무 열매를 먹는 행동을 했을 때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영역과 비교할 때 훨씬 크고 광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우리 연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신비의 영역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비의 영역을 두시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내가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로 역사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심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그러한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십자가를 통해 나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내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존재함을 증거하시며 그것을 아시고 그것 가운데 역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는 창과 같습니다. 십자가라는 창을 통해 눈이 열려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사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우리 마음을 주도하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소망과 확신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