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리더십 부재 속… “현대차가 한 방 해낸 것”

입력 2025-03-25 18:59
사진=AFP연합뉴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정부 공백’이 길어지면서 현대자동차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직접 대미 투자에 나서고 있다. 주요국이 정상 외교를 통해 발 빠른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 면제를 요구하는 상황과 달리 한국 정부의 대응이 뒤처지고 있어서다.

현대차그룹이 24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에서 발표한 21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한국 기업이 발표한 첫 대규모 투자 결정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 스티브 스컬리스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제프 랜드리 루이지애나 주지사 등과 나란히 서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기업인이 미국의 관세전쟁 전면에 나선 한 컷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투자 발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4월 2일 국가별 상호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각국을 압박하는 시점에 이뤄졌다. 현대차그룹은 현지 생산시설 증대, 전기로 제철소 건립 등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맞춤형 투자안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의선 회장을 만나 영광”이라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업계에선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미국에 대한 투자를 촉구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온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통상 정책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상황에서 현대차가 한 방을 해낸 것”이라며 “한국과 미국이 협상 파트너로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대한항공이 지난 21일 미국 보잉, GE에어로스페이스와 총 327억 달러(약 48조원) 규모의 항공기·엔진 공급 계약에 서명한 것도 양국의 긴장감을 완화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서명식에는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함께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한·미 양국 관계 장관이 기념식에 공동 참석한 첫 사례였다.

업계에선 대기업들이 추가로 대미 투자가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반도체업계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도체·의약품 등에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며 관세율 25%를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투자를 확대할지 관심을 모은다. 삼성전자는 미국 현지 반도체 생산 공장 건립을 위해 370억 달러를,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