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예산을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산업 지원과 ‘트럼프 통상 리스크’ 대응에 집중 투입한다. 재정이 민생경제 회복의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건전 재정’ 대신 ‘적극 재정’으로의 변화도 예고했다. 여기에 저출생·고령화와 경제성장률 하락으로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는 만큼 기초연금 등 의무지출도 구조 개편 여부를 따져보기로 했다.
정부는 25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이 같은 ‘2026년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 지침’을 의결·확정했다. 각 부처는 ‘예산 가이드라인’ 역할인 이 지침에 따라 내년도 예산 편성 요구서를 작성하고 5월 31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2024~2028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올해(677조4000억원)보다 4.0% 늘어난 704조2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700조원대에 진입할 전망이다.
정부는 이번 예산안 편성 지침에서 산업·통상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찍었다. AI 인프라 확대와 바이오·반도체 및 조선·방산·철강 등 국내 주력 산업을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트럼프발(發) 통상 불확실성에 맞서 수출 애로 해소 및 공급망 안정화에도 예산을 집중 투입한다. 민생 안정과 인구·지역소멸·기후위기 등에 대한 지원 및 민생 범죄 대응, 방위산업 육성 등 국민안전 확보에 대한 지원도 확대한다.
2022년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빠짐없이 등장했던 ‘건전 재정 기조’ 등의 표현은 이번 지침에서 사라졌다. 기재부는 “경기 회복 마중물과 산업 경쟁력 제고, 사회 구조 개혁 지원 등에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된다”고 했다.
대신 정부는 그동안 건전성에 중점을 뒀던 재정 기조를 지속가능성 확대로 넓힌다. 이를 위해 고강도의 ‘의무지출’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기재부가 예산안 편성 지침에서 의무지출 조정 계획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무지출은 국민연금 등 4대 공적연금을 비롯해 지방교부세,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등과 같이 법에 지급 의무가 명시된 고정적 지출이다. 정부는 의무지출의 구조 개편 노력과 함께 중장기 수요를 따져보고 필요 시 효율화 방안을 적극 강구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이 초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 20%)에 진입한 상황에서 의무지출 부담은 매년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의무지출은 올해 365조원에서 2028년 433조원으로 급증하게 된다. 반면 잠재성장률은 사실상 1%대로 추락하며 세수 기반은 흔들리고 있다. 기재부는 “성장률 저하와 고령화 등 의무지출 증가로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했다.
재량지출 구조조정도 이어간다. 재량지출은 사회간접자본(SOC), 연구개발(R&D) 사업처럼 정부 의지로 조정이 가능한 지출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서도 4년 연속 ‘재량지출 10% 이상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올해 정부가 개인이나 기업에 받지 않거나 깎아준 세금(국세감면액)은 역대 최대인 78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날 의결된 ‘2025년 조세지출 기본계획’에 따르면 올해 국세감면액은 전년 국세감면액 전망치(71조4000억원)보다 6조6000억원 늘어난 78조원으로 추산됐다.
정부가 부과한 세금 중 걷지 않는 비율을 의미하는 국세감면율도 15.9%로 법정 감면 한도(올해 기준 15.6%)를 3년 연속 웃돌 전망이다. 경기 부양을 위해 비과세나 세액·소득공제 등의 조세지출은 늘어난 반면 경기 둔화와 기업 실적 악화로 세수는 예상보다 적었던 탓이다. 기재부는 “국세감면 한도 준수 노력을 강화하고, 조세지출 효과성을 높이는 등 엄격한 관리로 안정적 재정 운용을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세종=양민철 김혜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