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미국은 하루에 한 척씩 배를 만들었다. 이제는 더 배를 만들지 않지만, 다시 시작하고 싶다. 동맹국들과 협력해서 배를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휴 휴잇 라디오와 진행한 26분 분량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부진한 조선업 현황을 개탄하는 데 약 5분을 할애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배가 필요하다”는 말을 세 차례나 반복했다.
미국이 자국 조선업 부흥을 위해 동맹국에 손을 내밀면서 대표적인 수혜 국가로 한국과 일본이 조명을 받고 있다. 앞으로 미국 조선 시장을 두고 한일전 양상이 펼쳐질 전망이다. 한국은 압도적인 기술력을, 일본은 우월한 외교력을 내세워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수주 경쟁을 넘어 기술과 외교가 맞붙는 전략적 대결 구도가 관전 포인트로 떠올랐다.
26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발표한 ‘미국 해양 조선업 시장 및 정책 동향을 통해 본 우리 기업 진출 기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 해군은 ‘2025 건조 계획’에서 지난해 295척이었던 군함을 2054년까지 390척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노후 군함 교체를 포함해 새로 건조해야 할 함정은 모두 364척이다. 여기에 투입하는 예산은 약 1조750억 달러(약 1579조1750억원)에 달한다.
에너지 패권 야심이 가득한 트럼프 대통령이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을 포함한 LNG 수출 확대에 나서면서 LNG 운반선의 신규 건조 수요도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미국 내 에너지 개발사들이 기본 설계를 진행 중인 LNG 프로젝트는 총 22건이다. 모두 최종 투자 결정을 받으면 미국의 연간 LNG 생산량은 1억5980만t이 추가로 늘어나게 된다.
미국은 군함을 건조할 기술력도, LNG선 수요를 감당할 능력도 사실상 없다. 미국 조선업은 200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해 현재는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반면 같은 기간 트럼프 대통령의 눈엣가시 중국은 세계 1위 조선 강국으로 성장했다. 미 해군 정보국은 2023년 기준 중국의 조선 능력이 미국의 232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둘의 기술 격차가 커지자, 미 의회는 지난해 12월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 및 항만시설법’(SHIPS for America Act)을 발의하며 대응에 나섰다. 이 법안은 전시 해상 수송 능력 강화를 위해 미국 정부가 조약 동맹국 및 전략적 파트너와 협력하고 해양 산업 전반에 대한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 중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선박을 건조할 역량을 갖춘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두 나라는 모두 미국의 핵심 안보 동맹이자 조선업 전통 강국이다. 기술력과 생산 능력은 한국이 일본을 앞선다. 하지만 미국과의 외교·정치적 신뢰 측면에서는 일본이 우세하다는 평이 나온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미 LNG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친환경 선박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미 국방부가 요구하는 군함이나 군수 지원선도 건조할 역량을 갖췄다. 조선 3사(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는 유럽과 중동의 까다로운 발주처를 상대로도 기술력을 입증했고 대량 생산과 납기 준수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LNG선 분야에서만큼은 우리가 기술적으로 확실히 앞서 있다”며 “일본은 2015년 이후 대형 LNG선을 수주한 적이 없고 현재는 주로 소형 벙커링 선박만 건조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2003년까지 세계에서 배를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였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현재는 중국과 한국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최근 일본은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새로운 전략을 모색 중이다. 양국은 2023년 6월 ‘미일 방위 산업 협력·취득·유지정비 정기협의’(DICAS)를 출범하고 방위 장비의 공동 개발과 생산, 정비 협력에 나섰다. 또 관련 법 개정을 통해 훈련 목적으로 일본 주변에 전개하는 모든 미군 함정에 대해 일본 민간기업이 정비·보수를 맡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주둔한 미 7함대 소속 함정만 일본 내에서 정비할 수 있다.
일본이 외교력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조선 수주전에 뛰어들면 한국이 기술력만으로 경쟁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조선 수주는 단순한 ‘스펙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조선사 관계자는 “과거 카타르의 LNG선 발주에서도 일부 물량을 중국에 뺏긴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LNG 최대 수입국이 중국이었기 때문”이라며 “외교·무역 관계가 수주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기술력만 보면 한국에 발주하는 게 당연하지만, 정치·외교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며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중소형 선종 일부를 전략적으로 일본에 맡길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이 기술 우위를 내세우면서도 미국 정부와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외교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 조선업계의 과도한 경쟁은 잠재적 리스크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한 예로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을 둘러싼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의 갈등이 ‘원팀 코리아’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중국이 조선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계속하는 가운데 한국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하는 상황”이라면서 “국내 조선업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며 한·미 간 조선 협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