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2028년까지 미 현지에 210억 달러(약 31조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비슷한 시각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 BYD의 중국 선전 본사를 방문했다. 미·중 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설자리가 갈수록 줄어드는 와중에 한국의 대표 기업 총수들이 직접 돌파구를 마련하려 나선 것이다. 관세·무역 분쟁의 실마리를 풀어줘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탄핵 블랙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 기업들만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대미 투자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으로 미국 내 자동차 시장의 안정적 공급망 확보를 꾀했다고 했다. 여기에 미국의 상호 관세 부과(4월 2일)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현대차는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도 얻어내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이 회장은 지난달 부당 합병 등 혐의 재판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첫 해외 일정으로 중국을 택했다. 지난 22일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에 이어 BYD 왕촨푸 회장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의 견제와 제재를 받지만 인공지능(AI)·반도체 굴기에 나선 중국 시장을 놓칠 수 없음을 이 회장의 발걸음이 웅변했다.
지금 국내 산업계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건 미국의 관세 폭탄과 중국의 첨단 기술 질주에 따른 제품 경쟁력 저하다. 외국의 관세 및 제조업 부흥 정책에 대응하려면 정부와 정치권이 먼저 외교력, 정보력, 입법을 통해 기업의 길을 터줘야 하는 게 순리다. 하지만 탄핵 정국이 초래한 정쟁은 이런 당연함조차 외면하고 있다. 민·관·정이 하나 돼 경제 전쟁에 나서는 다른 나라 사례는 우리로선 언감생심이다. 정 회장과 이 회장의 행보에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일당백이 돼야 하는 대한민국 기업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