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역사는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종들이 이룬 영광스러운 기록이다. 동시에 ‘가라지’가 함께 자란 현장이기도 하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선교 140주년을 맞아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든 중요하지만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 12가지를 선정해 우리를 이해하는 거울로 삼으려 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 부부와 호러스 G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이들이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후 아주 오랜 기간 한국 기독교가 미국 기독교 영향권 하에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지금도 광장의 태극기 집회에서 성조기가 나부끼고 한국인 청중에게 영어로 동시통역하며 ‘세이브 아메리카’를 모방한 ‘세이브 코리아’를 외치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조선을 식민 지배한 나라는 일본이고 기독교를 전파한 나라는 미국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식민지 지배국과 선교국이 같았다면 당시 많은 피 선교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독립운동이 곧 반(反) 기독교 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선교사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나라 잃은 백성에게 기댈 언덕이었다. 학교를 세워 반봉건·반외세의 선봉이 되게 했고 병원을 열어 가난한 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해방 후 선교사는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전쟁고아를 거두는 구세주였으며 선진국 미국 문물을 전해 주는 통로였다.
선교사는 유형의 유산뿐 아니라 신앙고백과 성경 해석, 교회 시스템, 예배 형식 등 무형의 유산을 남겼다. 이후에는 유학생들과 번역된 신앙 서적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이 이어졌다. 미국과 왕래가 쉬워진 80년대 이후에는 미국의 예배 스타일과 음악이 금세 한국에 들어와 유행하곤 했다.
한국교회가 미국교회로부터 얻은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9세기 말 미국 복음주의 교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였다고 평가되는데 바로 그 교회가 한국에 이식된 것이다. 건전한 신학과 뛰어난 열정을 가진 복음주의가 한국에서 재현됐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이후 지속적 부흥과 성장의 전형을 제공했고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는 7, 80년대 부흥의 최고봉이었다.
한국교회가 한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역할을 한 데도 미국교회의 공헌이 크다. 복음과 함께 가르친 근면과 금욕과 자녀 교육은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됐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보여줌으로 근대 시민사회 성립에 도움을 줬으며 국가주의가 한국인에게도 전수돼 민족운동의 동력이 됐다. 대한민국은 짧은 시간에 기적의 역사를 이뤘고 더 기적적인 교회의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한 시대의 성공은 다음 시대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과거 영광에 안주하다가 지금 닥치는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위대한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의존하다 보니 자기만의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고민이 부족했다. 한 사회가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신학을 수립하는 대신 미국의 신학에 의존했다. 우리의 정서를 담은 우리 언어를 사용한 영성을 창출하지도 못했다. 물론 3·1 운동이나 신사참배 반대 운동같이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신학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벌어진 성경관 논쟁을 생각해 보자. 신생 한국교회에는 이 의제 자체가 생소한 것이었는데, 1920년대 미국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갈등을 목격한 유학파가 ‘자유주의’니 ‘유기적 영감설’이니 하는 외국에서 수입된 언어로 논쟁을 이끌었다. 그리고 씁쓸하게도 그 논쟁은 1950년대 교파 분열로 이어졌고 더욱 씁쓸하게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묵은 의제에 매달려 서로를 의심하고 있다.
남의 문제를 끌어안고 걱정하다 보니 정작 우리 사회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신학과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영성이 가르쳐진다. 남의 다리를 긁는 것처럼 영 시원치가 않다. 한국의 근대사는 고난으로 점철됐다. 식민 통치, 분단과 전쟁, 산업화, 군사 정권과 민주화, 세계화에 이어 마침내 비상계엄의 역사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온갖 갈등이 우리 사회를 분열과 몰락으로 이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계와 시민사회가 격변하고 K-컬처는 식민주의를 탈피해 우리의 언어로 질문하는 법을 체득했다. 그러나 교회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몇 안 되는 과거 지향적 집단으로 남게 됐다.
한 세기 전 그렇게 위대했던 미국 복음주의는 지금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는 진작부터 자유 시장경제와 국가주의의 기존 질서를 뒷받침하는 생명력 없는 시민 종교로 전락했는데 이제 트럼피즘과 결합해 역사의 무대에서 힘을 잃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위기를 맞은 한국교회, 지금이 바로 미국 중심주의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사고할 적기다.
<약력>△백석대 교수(역사신학) △인천 흥광교회 담임목사 △서울대 철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