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시인 정지용이 ‘향수’에 그려낸 고향은 평범한 농촌이다. 그의 그리움에 깊이 유대감을 느꼈던 건 광활한 지평선에 자리한 내 고향의 정경과 닮아서다. 묵혀뒀던 오랜 기억이 시 구절마다 촘촘히 얽혀서 꿈인지 생시인지 가닿지 못하는 아득함으로 곧잘 우수에 젖고는 했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 충북 옥천이었다는 것을 안 건 불과 몇 해 전이다. 나들이 삼아 드나들던 옆 동네 옥천의 풍경은 그의 기억과는 전혀 달랐기에, 변하고 또 변해가는 땅 위의 삶이 어쩐지 씁쓸하게 다가왔다. 거리의 간판,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 편의점 의자 따위의 현대 생활양식은 물론 사람들의 옷차림까지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에는 비닐하우스와 창고형 건물이 즐비했다. 국내 묘목의 70%를 생산·공급하는 대규모 유통단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꿈엔들 잊히지 않을 거라던 정겨운 고향은 이 세상에 없다. 하기야 ‘향수’가 발표된 건 1927년 3월이니, 100년이라는 시간이 고이 흘러갔을 리가. 묘목 시장 초입에 이르자 2차선 골목으로 차들이 끊임없이 들어섰다. 유쾌한 표정의 사람들이 마당과 화단, 화분에 심을 온갖 종의 꽃과 나무를 고르느라 분주했다. 나도 화분에 심을 식물을 찾아 매대를 기웃거렸다. 등이 따뜻하다 못해 얼얼해질 정도로 봄볕이 쏟아졌다.
시인은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파릇한 잎이 돋고, 싱그러운 열매를 맺고, 정원을 다채롭게 가꿔 줄 꽃과 나무가 고향 땅에서 자라나고 있으니. 100년 뒤 고향이 이렇게나 생동감이 넘친다는 걸 안다면 기쁘게 여겼으리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사는 게 바쁘면 그리움마저 잊고 지내게 되나 보다. 잘 있으려나. 해설피 금빛 벼 이삭 넘실대던 내 고향.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