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신뢰 회복 청구서

입력 2025-03-24 00:35

최근 사석에서 만난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비정상의 정상화로 가는 길에 어마어마한 청구서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고 했다. 나라 꼴을 걱정하는 와중에 조심스럽게 나온 말이다.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은 대가, 앞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에 관한 일갈이었다. 관료 출신인 그는 “미국은 우리를 정상 국가로 보고 있지 않다”며 “정부 간 정상적인 외교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전했다.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을 ‘민감 국가’로 지정하는 것을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냐는 물음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었다. 미국 정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이어진 대혼란 정국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한국을 하대하는 기류를 애써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기업인뿐인 것 같다.

신뢰는 인간관계 외에도 국가의 운영과 사회·경제 활동을 이루는 중요한 가치다. 한 번 깨진 신뢰를 되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국가 차원의 신뢰 상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수차례 학습했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전방위 보복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잃어버린 신뢰 회복의 어려움을 체감한 대표적 사례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사드 배치를 결정했음에도 중국은 자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무엇보다 친밀하다고 여겼던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느낀 배신감이 컸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경제 보복은 관광 및 한류 금지 등 한한령(限韓令)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는 중국 사업에서 끝내 철수했고 관광·소비재 산업을 비롯한 한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는 국가 간 신뢰 상실이 기업에 얼마나 직접적이고도 가혹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줬다. 2018년에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인해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일본이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의 수출 규제를 단행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 경제를 떠받치는 반도체산업의 공급망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국내 기업은 급히 대체 거래처를 확보하고 국산화를 추진하는 데 비용을 들여야 했다.

‘민감 국가’ 지정을 두고 확대 해석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일부 있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지정 배경으로 한국의 정치 불안정성을 꼽는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언급한 ‘4류 정치’ 탓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글로벌 무대에서 뛰는 우리 기업이 사업을 확장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현실을 우리는 여전히 목도하고 있다. 기업도 무너진 신뢰 회복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실기가 단적인 예다. 경쟁자에게 기술 주도권을 뺏긴 삼성전자는 시장의 신뢰를 단번에 잃고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 중에 있다. 지난 19일 열린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고경영진이 수차례 고개를 숙이며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것은 신뢰 회복의 첫발이다.

하지만 단순한 사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자세는 기본이며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보상과 재발 방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할 원칙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 지도자는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책임 회피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신뢰 회복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기업은 정부의 실책과 신뢰 상실로 인한 비용을 대신 치르고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신뢰 회복 청구서를 받아들 때는 감당하기 힘든 책임과 대가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