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구례 여행

입력 2025-03-24 00:33

숙소에 가방을 두고서 행사가 준비된 동네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도 앱에는 걸어서 15분 거리라고 나오지만, 숙소 대문을 나서자마자 안내되는 길의 반대로 걸었다. 동네 구경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문패에 나란히 적힌 부부의 이름을 읽고, 신도시인 우리동네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전파사, 속옷가게, 기원, 정미소, 쌀집 같은-상점들 간판을 읽었다. 동네 주민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상점들은 지도 앱에 등록돼 있지 않았다. 1970년대가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다분히 자의적일 테지만, 사람들이 이 작은 동네에 여행을 하러 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간여행.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여행. 나에겐 추억에 속한다지만, 젊은 사람들에겐 추억은 아닐 텐데, 그럼 그것은 무엇일까. 경험해 보지 않은 과거의 시간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리움과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도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늦은 밤 숙소에 돌아와 방 한 구석에 반듯하게 놓인 노트를 펼쳐본다. 숙박객들의 방명록인데, 낙서와 메모 등이 알록달록 빼곡했다. ‘들리는 건 오직 새소리뿐. 완벽한 휴식!’이라고 적고, 야외 의자 등받이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는 아까 초저녁에 이 동네를 두루 살펴보았다고 짐짓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침이 나에겐 남아 있었다. 아니, 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아침이 나에겐 남아 있었다. 처음 와 본 이곳의 오후와 저녁과 밤은 오늘 겪었고, 내일은 새벽과 아침을 겪게 될 것이다. ‘날이 좋다면 밤에 마당에 앉아 별을 꼭 보시길’이라는 메모를 발견한다. 나는 바깥에 나가본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형형한 별빛을 한참 올려다본다. 이런 걸 꼭 보라고 권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이 다시 와서 발견하게 될 일이 희박하지만, 메모 옆에 ‘감사합니다’라고 적어둔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