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소영웅시대의 종말을 꿈꾸며

입력 2025-03-21 00:37

꽤 오래전의 일이다. 한 대학에서 벌어진 비리를 보도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낀 집단이 기자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댓글에서 ‘난도질’이 벌어졌다. 인신공격은 기본이고 학창시절과 가족 이야기까지 튀어나왔다. 내용들은 사실과 달랐다.

신이 난 댓글들 사이에서 내가 하지 않은 말은 내가 한 말이 됐다. 왜곡되고, 부풀려졌다. 지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보이지 않는 적들의 공격을 무참히 받아내려니 두려웠다. 오프라인에서 웃으며 대화하던 누군가가 그런 댓글을 썼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람 만나기가 두려웠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거나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섬뜩한 생각도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내 그들의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가해자들은 사라졌고, 피해자에겐 분노와 공포가 남았다. 일반인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연예인들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악의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의 고통과 상관없이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댓글의 수위가 자신의 수익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도 아닌데, 열과 성을 다해 한 사람을 공격하는 데는 어떤 진심이 담겨 있는 걸까.

영웅심리의 사전적 의미는 ‘비범한 재주나 뛰어난 용기를 발휘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비뚤어진 영웅심리와 디지털 시대가 만나 ‘사이버 레커’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유익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나 선한 마음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이 빠져 있는 것은 소영웅주의다. 자신의 행동이 개인이나 사회에 어떤 해를 끼칠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 발현되는 그릇된 공명심. 누군가를 공격하면서 유명세를 얻고, 구독자 수를 늘려 경제적 이득도 얻는다. 언론이 아니라서 공익성이나 보도 윤리라는 잣대도 적용되지 않는다.

연예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악플러와 사이버 레커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인신공격과 폭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반복되는 탓이다. 메타인지(자기객관화) 역시 이들의 관심사가 아닌지, 서로가 서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촌극도 벌어진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공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확인된 사실에 의거한 보도는 언론이, 위·불법은 수사기관이 다룰 일이다. 이미지 추락과 대중의 지탄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감당해낼 몫이지만, 얼굴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서 문제의 본질과 상관없는 괴롭힘을 감내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고(故) 김새론 배우 사망 당시 연예인에게 ‘악플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심리 탓이다. 그들은 선망의 대상인 사람을 공격하면 자신이 그 사람만큼 유명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분석했다. 관심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비극을 빌미로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이어간다.

이들을 저지할 수 있는 건 유해성 콘텐츠에 대한 법적 제재와 대중의 분별력이다. 21일 개봉하는 영화 ‘스트리밍’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하는 스트리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를 만든 조장호 감독은 “개인방송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건 여과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