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수단 핏빛 내전 생존자… 영화 통해 트라우마 덜었죠”

입력 2025-03-21 05:00
권예하씨가 19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로운 작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는 아프리카 남수단 내전 생존자입니다. 포탄 소리가 울리고 피비린내를 풍기던 그곳에서 나의 영화는 시작됐습니다.”

아직은 앳된 얼굴로 수줍게 웃던 19세 영화감독은 자신을 ‘전쟁 생존자’라고 소개했다.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서 간 아프리카 남수단 작은 마을에서 겪은 전쟁의 참담함과 가족의 트라우마 극복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로운 작음’으로 각종 상을 받은 권예하씨다.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입학한 권씨는 19일 서울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나 어린 시절 경험한 전쟁과 이별, 회복과 소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권씨는 2006년 권요셉·이진숙 선교사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빌리온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부모님을 따라 이집트 케냐 우간다를 거쳐 2015년 아프리카 남수단의 토릿마을로 향했다. 가장 가난한 나라 안에서도 작은 마을이었지만 빗속에서도 거침없이 춤추고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파족 부족과의 삶은 9살 소녀에게 즐거움이었다.

권씨가 2015년 아프리카 남수단 토릿 마을의 교회에서 친구와 함께 전통 악기 젬베를 연주하는 모습. 권씨 제공

권씨는 “한국에서 살았다면 수학 문제를 풀고 태권도를 배웠겠지만 나는 나일강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며 불을 지폈다. 전통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소똥을 뭉쳐 만든 공으로 친구들과 놀았다”면서 “언어는 달랐지만 매일 밤 친구들이 올 아침을 기다리며 잠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1년 후 전쟁이 마을을 덮쳤다. 웃음과 노랫소리로 가득했던 거리는 탱크 굉음과 폭발음에 묻혔고 비명 속에 시신이 늘어갔다. 매일 찾아오던 친구들의 발길이 끊겼고, 키우던 반려견과 집, 마을이 차례로 사라졌다.

총성이 들리면 어린 권씨를 위해 아빠인 권 선교사는 태양열 전력을 이용해 영화를 틀고 권씨의 귀에 헤드셋을 씌웠다. “영화를 보면 총소리도 비명도 잊을 수 있었죠. 그때는 어려서 몰랐지만 아빠가 보여준 영화들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한국에 와서야 알았어요.”

마을 친구들과 발을 맞대며 게임을 즐기는 장면. 권씨 제공

전쟁이 길어지며 권씨 가족은 외교부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가족에게 한국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권씨는 “한국에서 풍성한 고기, 시원한 에어컨, 어디서나 터지는 휴대폰 등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였지만 전쟁을 겪다 온 우리에겐 그 소중함이 매우 선명했다”고 말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무렵, 집 안에 울음소리가 퍼졌다. 트라우마였다. 가족 모두 전쟁의 상처와 기억, 감정을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다. “어느 날은 아빠 방에서, 또 어떤 날은 엄마 방에서 울음소리가 났어요. 아빠는 김치나 케첩에서 피 냄새가 난다며 구역질했고 엄마는 옆집 공사 소리를 총성으로 착각해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죠.”

지난 2월 남수단 수도 주바에서 봉사활동 중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권씨 제공

권씨는 “나는 부모님 보호 덕에 트라우마가 적었다”면서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아빠가 전쟁 속에서 틀어준 영화들이 내 트라우마를 덜어줬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는 “남수단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그때 영화를 반복해 봤는데 그러면 토릿 마을의 저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의 꿈을 품고 경기도예술고에 진학한 그는 “아픔을 외면하려 영화에 몰두했지만 전쟁 속 친구들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은 계속 있었던 것 같다”며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전쟁과 토릿 마을 친구들, 부모님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은 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영화는 내게 위로이자 행복 그리고 목적”이라는 권씨는 “앞으로 일상의 소중함과 당연한 듯 누리는 작은 것들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다”며 소망을 이야기했다. “작은 것들이 큰 울림이 되도록 그들의 영화로움을 전하는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글·사진=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