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으로 치닫고 있는 탄핵 사태
폭력과 혼란 대신 승복과 포용
치유와 회복의 시간 이어져야
여야 대결 끝내고 개헌도 필요
국민은 분열 조장 유튜브 끊고
좋은 지도자 뽑는 안목 가져야
폭력과 혼란 대신 승복과 포용
치유와 회복의 시간 이어져야
여야 대결 끝내고 개헌도 필요
국민은 분열 조장 유튜브 끊고
좋은 지도자 뽑는 안목 가져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얼마 전 세상이 ‘봄의 설국’으로 변했을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이 문장이 며칠째 계속 머릿속과 혀끝에서 맴돌고 있다. 문장을 조금 바꿔 “탄핵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이었다”라는 말을 계속 되뇌이고 있어서다. 이 빈칸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지금의 혼란이 더욱 혼탁해질 수도, 다시 맑아질 수도 있다. 그것에 따라 어쩌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빈칸에 꼭 채워졌으면 하는 말들을 떠올려봤다.
우선 탄핵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이 채워지길 바란다. 대한민국은 지금 진보 진영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보수 진영의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는 동정론이 대치하고 있다. 그런 대립이 벌써 4개월 가까이 됐다. 처음에는 분노가 압도적이었지만 지금은 동정론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대통령이 파면되든, 안 되든 어느 한쪽은 깊은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이민을 고민한다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렇기에 정부나 여야 정치권은 앞으로 좌절한 이들의 상처를 보듬는 데 온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과에 실망한 이들도 마음을 추스려 하루빨리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승리한 쪽의 오만한 축포나 실망한 쪽의 폭력적 반발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 승복과 포용,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빈틈없이 이어져야 한다.
‘비로소 정치가 고쳐지기 시작했다’는 말도 채워 넣고 싶은 문구다. 탄핵 사태가 빚어진 이유는 정치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철저한 야당 무시, 이에 맞선 야당의 지독한 입법 독주가 2년 넘게 이어졌다. 완충지대 없이 극과 극만 남게 되자 결국 계엄으로 폭발했다. 눈이 내리면 새 세상이 펼쳐지듯 탄핵 터널을 지나면 대결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새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나아가 대통령이나 거대야당이 권한을 과도하게 쓰지 못하게 하고, 덩치 큰 양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누리지 못하도록 권력구조 개편도 뒤따라야 한다. 탄핵 사태를 거치며 대통령이 너무 쉽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모호한 탄핵 기준 등 ‘87년 헌법’의 허점도 많이 드러났다.
‘정치 유튜브의 공해가 걷혔다’는 소식도 기다려진다. 국론 분열이 극심해지고 상대 진영을 향한 증오가 확산된 것은 가짜뉴스와 선동으로 가득찬 유튜브 콘텐츠가 기승을 부린 탓도 크다. 국민들의 일상에 거짓 콘텐츠가 공기처럼 흔하게 돌아다니고, 그 풍조를 악용해 분열을 심으며 돈을 버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여론을 엉뚱한 방향으로 주무르고, 국회의원들마저 거기에 휩쓸려 극단으로 치닫곤 한다. 탄핵 사태가 끝나면 정치권도 국민도 분열을 선동하는 정치 콘텐츠와 과감히 헤어져야 한다.
‘민심이 더 똑똑해져 있었다’는 말도 빈칸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볼썽사나운 정치는 결국 우리 유권자들이 잘못 뽑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국민들이 다시는 이런 저급한 정치에 당하지 않으려면 냉철한 안목으로 좋은 정치인과 그렇지 않은 정치인들을 제대로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후보 됨됨이는 안 보고 진영만 보고 표를 찍어줘서도 안 된다. 그래야 정치를 망가뜨리고 분열을 키우는 이들이 걸러질 수 있다. 무엇보다 똑똑한 민심의 정점은 현명한 지도자를 뽑는 일이다. 국민을 통합할 수 있고, 국정을 유연하게 운영하며, 대화와 협치에 능한 이가 그런 지도자다. 그 지도자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도 중요한 선택 기준이어야 한다.
끝으로 이런 것들을 통해 탄핵 사태가 끝나면 우리 민주주의가 한층 더 성숙될 수 있어야 한다. 탄핵의 터널로 들어가는 순간 잃은 게 아주 많았지만 이제 빈칸을 잘 채워 종국에는 얻은 게 더 많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지금 나라 밖에서도 한국의 탄핵 사태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를 빨리 되찾으면 한국 민주주의 회복력에 대해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겠지만 반대로 무질서와 폭력, 진영 대립이 지속된다면 그땐 한국을 더는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이제 오롯이 정치권과 국민들 하기에 달렸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