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K-컬처는 한국인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입력 2025-03-21 23:42
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필자는 지금 베트남 호찌민에 있는 한 공과대학을 방문 중이다. 1980년대 초의 한국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젊은 인구구조를 무기로 성장을 거듭하며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가구가 꾸준히 늘고 있고, 이들이 이룬 부(富)가 그대로 자식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예전 우리나라처럼 과거제도를 경험했던 탓인지 베트남에서도 신분상승을 위한 교육열이 뜨겁다. 베트남의 학부모와 자녀들이 이 유명 공과대를 찾은 이유는 해외로의 유학. 똑똑한 아이들에게 수준 있는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인력과 인프라가 부족해, 입학 후 처음 2년 동안 이곳에서 전공기초를 가르치고, 나머지 2년 동안 본격적인 전공을 해외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해, 현지에서 졸업장을 받아 취업에 도전하는 루트다.

이들이 유학을 원하는 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건비. 베트남에서는 유명 4년제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로컬 기업에 취직하는 경우 월 급여가 채 100만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더 쳐주는 곳으로 부단히 이동 중이다. 급여 수준은 그 나라의 생산성과 경제 수준, 산업구조 등 다분히 하드웨어적인 지표로 보기 쉽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는 방식으로서의 문화적 현상이다. ‘당신의 연봉은 얼마입니까?’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일련의 문답은 개인의 역할, 인권, 다양성, 사회구조의 유연성 등 그 세계의 복잡다단한 내적 상황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이동은 ‘문화적 투표’로 보아야 타당하다. 자아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류는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전, 경제적 안정과 성장 가능성(upward social mobility), 그리고 행복과 같은 사적(私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나은 문화환경으로 꾸준히 이동하고 있으며, 이는 거의 대부분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K-팝’, ‘K-드라마’, ‘K-푸드’는 물론 이제는 ‘K-뷰티’, ‘K-문학’에 이르기까지 ‘K’로 시작하는 신조어가 참 많은 요즘이다. 필자처럼 아시아 인구가 극히 적은 해외 소도시에서 자녀를 기르고 있는 부모에게는 이처럼 감사한 일도 없다. 평소 무던히 지내던 우리 아이들이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BTS나 뉴진스에 대한 짤막한 대화로 시작하던 것이, 이제는 굳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불닭볶음면과 김을 떼어먹으며 함께 깔깔대는 월간 행사가 되었다. 우리 막내딸아이는 네일아트를 좋아하는데, 주말이 되면 친구들이 찾아와 거의 반나절 동안 ‘K-네일아트’를 받고 흔쾌히 수고비를 건넨다. 덕분에 딸아이의 은행잔고는 나날이 늘어 가끔 급하게 달러가 필요할 때 융통을 부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딸아이의 거만한 미소에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아시안으로서 백인 일색인 이 좁은 타지에 잘 적응하고 있는 이 소녀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필자야말로 ‘K’로 시작되는 그 모든 문화현상의 참 수혜자이며, 또한 이 글로벌 트렌드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에 깊이 공감하는 국내외 한국인이 어림잡아 수십만은 되지 않을까.

이렇게 고마운 ‘K-컬처’는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그 근원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겠으나 BTS를 비롯한 한국의 팝스타들을 답에서 제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이룬 역군이며 공로자다.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필자이지만 이들의 성공에는 분명 공식이 있어 보인다. 이들은 ‘연습생’이라는 불안한 타이틀을 기꺼이 껴안았다. 주위 친구들 대부분이 선택한, 너무도 익숙하기에 포근한 그 길을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수년 동안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마주하며 흘린 그들의 ‘피땀눈물’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세상에 알려지며 한국은 물론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같은 시간 동안 경제적 손실을 감내하며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소속사의 노력 역시 한국문화의 세계적 대중화를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필수요소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 했던가. 몇 해 전 한 걸그룹과 소속사와의 분쟁이 불거지며 K-컬처 ‘제조시스템’에 빨간불이 켜졌다. 팀에 대한 소속사의 처우와 경영권 갈등, 콘텐츠 기획방식의 문제점 등 여러 이슈가 도마에 오르며 팬들의 우려가 이어졌다. 걱정거리는 또 있다. 한국의 한 드라마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하면서 당시 제작을 지원했던 거대 OTT 사(社)와 제작사 간의 수익분배 구조상 형평성 역시 큰 문제로 떠올랐다. 약 250억 원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었던 이 작품이 투자사에게 가져다준 수익은 약 1조 원. 시장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조금 과하단 생각이 든다. 일부에서는 이를 위기로 간주하며 K-컬처 보호를 위한 시민참여를 호소하기도 한다. 나름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포크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식사 도구로서의 포크가 유럽에 처음 도입된 것은 11세기경. 비잔틴 제국의 공주가 베네치아 가문으로 시집을 올 때 가져온 금으로 된 두 갈래짜리 포크가 그 시초라는 설이 있다. 한때 기이하게만 여겨지던 이 도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이유가 있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당연한 소리이지만, 포크를 사용하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비해 위생적인 식사가 가능하다. 더 중요한 것은, 포크의 사용으로부터 음식의 종류나 모임의 성격 등에 따른 이른바 ‘테이블 매너’와 격식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서양의 식탁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크를 처음 만든 이가 누구인지 우리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기능상 이점과 거기에서 파생된 문화(경양식집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80년대 한국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어색하게 ‘스테끼’를 썰던 이들이 열망한 것은 단지 서양식이 아니라 ‘있어빌리티’였으리라)를 인류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며, 이러한 문화는 최초의 도구를 만든 이가 아니라 이를 향유하는 모든 이의 것이 된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식량자원이 보급되어 포크가 가져다주는 이점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이 발명품을 과감히 버리고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수용할 것이다. 한국인이 자연스레 따르던 수직적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히딩크의 축구팀에서 학연을, 대한항공에서 부기장의 기장에 대한 존댓말 사용을, 그리고 카카오에서 직함을 버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낱 포크를 비틀스나 뉴진스의 음악에 견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필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적 사유(思惟) 끝에 세상을 보는 관점이 가끔 의미 있는 전환을 맞이하기도 하니 한번 들어보시라. 포크와 달리 대중음악은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할 수 없다. 비틀스가 예스터데이이고 예스터데이가 비틀스다. 그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특수성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는 포크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을 뉴진스에게도 유효히 던질 수 있다. 뉴진스의 활동 목적은 K-컬처의 영달과 확산이었나. K-컬처의 주인은 한국인인가. K-컬처는 보호의 대상인가.

BTS와 뉴진스, 그리고 그들의 음악과 퍼포먼스가 K-컬처의 중심이 된 것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과 자신이 속한 팀의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청년들일뿐, 처음부터 K-컬처와 같은 빅픽쳐의 완성을 염두에 두었다 보기 어렵다. 그들이 원하던 성공의 잣대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분명 매우 사적인 욕망이었을 것이며, 그 결실로 태동한 K-팝을 감사하게도 현재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있을 뿐이다. 포크가 만들어낸 식사 예절이나 식탁 문화처럼 그들의 기여로 탄생한 K-컬처 역시 창작자나 기획자 혹은 한국인만의 것이 아닌, 이를 향유하는 세계인 모두의 것이다. 또한 처음 두 갈래였던 포크가 시대와 지구인의 손을 거치며 세 갈래, 궁극적으로 네 갈래로 혁신을 거듭(reinvention)한 것과 같이, K-컬처 역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꾸준히 재탄생을 거듭하고 있다. 모든 발명에는 그 원조(元祖)가 있겠으나, 현실에서 우리가 실제로 접하는 것은 여러 사람의 손과 지혜를 거쳐 더 이상 누구의 것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전혀 새로운 현상이나 아이디어일 확률이 높다.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세계인을 열광케 하는 더 신선하고 기발한 멜로디와 퍼포먼스가 지구상 다른 어딘가에서 튀어나온다면 K-팝은 잊히게 될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창작자와 팬, 그리고 “K”로 시작하는 슬로건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던 장사치, 그리고 문체부 공무원 정도가 아닐까.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K-컬처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당위성을 납득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화는 인류 보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회적 장치로서, 우리의 자발적 선택을 받아 형성, 확산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노력해야 한다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가 존속 자체를 위해 애써 보호해야 하는 문화는 이미 문화로서의 생명력을 잃었을 확률이 높다.

현재 불거지고 있는 K-컬처 산업을 둘러싼 문제들은 다분히 이해 관계자들이 실 손익을 따져가며 풀어가야 할 사적 영역에 속한다. 앞서 이야기한 OTT 드라마의 시즌2 제작비는 데뷔작에 비해 네 배 상승한 1000억원. 플레이가 반복될수록 실력 있는 을은 곧 갑의 위치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굳이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이해관계 밖에 있는 제삼자가 단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부 K-컬처의 기원이나, 훼손 가능성, 혹은 그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의 삶에 독립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좀 더 이기적인 소재를 찾아보시라 권한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