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무너진 건강치 못한 사회
약속 어긴 지도자들 책임 커
개인 성공만 좇는 교육 바꿔야
약속 어긴 지도자들 책임 커
개인 성공만 좇는 교육 바꿔야
공자의 제자 중에 언변이 뛰어나고 실무 능력이 출중했던 자공이 ‘정치’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양식을 넉넉히 하고, 군대를 충실히 키우는 것, 그리고 백성의 신뢰”라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세 가지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버려야 한다.” “남은 두 가지 중에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양식을 버려야 한다. 자고로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백성이 믿음을 잃으면 나라는 유지될 수 없다.”
국가가 존속하려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필수다. 하지만 공자는 백성의 신뢰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상하좌우의 소통이 용이하고, 약속이 지켜지며, 협력을 위한 비용이 줄어든다. 반면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갈등이 심화되며, 거래 비용이 증가하고, 정책 실행조차 어려워진다. 신뢰는 단순한 도덕적 덕목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삶의 질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이며 효율적이고 건강한 경제와 정치, 사회를 떠받치는 핵심 자산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정치의 핵심 기반인 신뢰가 붕괴하는 심각한 위기를 목도하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치 지도자와 사회 지도층의 책임이 크다. 이른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어째서 거짓말을 일삼고 약속을 어기며 공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주범이 됐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교육은 희망과 신뢰의 원천이었다. 부모들은 가난 속에서도 힘써 자녀를 학교에 보냈다. 교육을 받으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높은 교육열은 곧 기적같은 경제 성장의 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시험을 잘 치고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윤리적으로도 더 높은 책임감을 가질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들 개인의 성공이 곧 사회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성적 우수 상장에는 ‘타의 모범이 된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고위 공직자와 사회 지도층이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반복되고, 실체적 진실을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실정법 위반 여부만을 판단 기준으로 내세운다.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 가짜뉴스가 판치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유능함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에는 우리 교육의 한계가 도사리고 있다. 훌륭한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경험을 통해 길러진다. 하지만 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성적 우수자는 지도자로서의 인격과 품성을 함양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소외된다.
점수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교육은 성취와 윤리를 분리시킨다. 성적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환경에서는 공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가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한다. 이로 인해 그들이 사회 지도층이 되었을 때 공동체의 신뢰를 우선하기보다 개인적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이 오히려 강화된다.
성적과 인간됨은 별개이다. 교육이 개인적 성취를 위한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사회의 신뢰자산을 형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육은 경쟁 도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교육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뿌리 깊은 경쟁 구조와 성과 중심의 평가 방식은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고,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많은 저항과 혼란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기대할 수 없다. 개인의 성공만을 좇는 교육이 지속되는 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제는 교육을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