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선의는 돈이 된다

입력 2025-03-20 00:37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는 대영제국 시절 성행했던 노예제와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윌버포스는 반인권적인 이들 악습을 끊어내는 걸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무려 46년간 노예제와 노예무역 폐지법 제정에 매달린 이유다.

윌버포스가 활동했던 18세기 대영제국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노예무역국이었다. 인류애의 실천은 담보하되 국익 손실을 가져오는 이들 법 제정을 위해선 반대 세력을 반드시 설득해야만 했다. 이때 윌버포스가 택한 전략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영국 하원에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제출된 1789년 5월 12일, 그는 하원 연단에서 장장 3시간30분간 해당 법 제정으로 얻는 유무형의 국익을 역설했다. 영국 보수당 대표와 외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헤이그는 이 연설을 “동료 의원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이라고 평했다. 당시 의사록에 기록된 윌버포스의 연설 일부다.

“저는 열정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냉정하고 공정한 이성을 요구할 뿐입니다. 누구를 비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영국 의회가 이 끔찍한 무역을 계속 내버려둔 데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겠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모두 유죄입니다. (…) 우리의 정직한 행동은 곧 정기적으로 증가하는 무역이익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최근 출간된 ‘윌버포스’(홍성사)에 실린 일화 중 하나다. 저자 윤영휘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영국 3대 항구도시 헐의 상인 가문 출신인 윌버포스는 현실적 대안을 중시하는 실용적 성향이 강했다”고 말한다. “강요된 노동보다 임금노동이 더 효율적”이며 “악행엔 비용이 들므로 장기적 관점에선 악습 폐지가 이익”이라고 주장한 배경엔 실용을 중시한 그의 가풍이 있다는 것이다.

윌버포스는 무엇보다 도덕과 윤리 역시 국익을 증진하는 일종의 자본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른바 ‘도덕 자본(moral capital)’이다. 윤 교수는 “윌버포스는 도덕적 대의와 세속적 이익을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최대공약수를 찾으려 노력했던 인물”이라며 “실제 해당 법안 통과 후 영국의 대의에 지지를 보내는 국가가 늘었다”고 평했다. 이는 훗날 영국 주도의 국제질서 작동에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의 노예무역 폐지법이 발효된 지 30년이 흐른 1840년 브라질, 쿠바 등지엔 국제 노예무역 철폐에 힘쓰는 영국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현대사회에서 도덕 자본을 영리하게 활용해온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이끄는 미국은 셈법 복잡한 국제정치판에서 대의명분을 앞세워 결탁해 실리를 추구하는 데 능숙하다. 이를 강대국의 위선으로만 치부하긴 힘들다.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 등 명분을 내세워 국제사회에 변화를 가져온 실례가 있어서다.

오늘날 미국은 ‘선의는 돈이 된다’는 윌버포스의 교훈을 잊은 듯하다. 약육강식 논리 가운데 최종 승자는 미국이 될 것이므로 곧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이 논리 앞에서 도덕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예로부터 한 국가의 전성기는 태평성대와 함께 왔다. ‘어진 지도자의 치세로 나라가 안정돼 아무 걱정 없고 평안한 시기’를 일컫는 태평성대에서 평화 등 도덕 자본은 경제적 안정과 함께 빠질 수 없는 전제조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미국의 황금기가 오늘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선의 없는 경쟁, 정의 없는 성과, 우방과의 평화 없이 쌓아 올린 황금기는 그야말로 사상누각일 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진정한 태평성대를 맞으려면 선의가 필요하다. 도덕 자본은 돈이 된다.

양민경 미션탐사부 차장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