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공지능(AI) 기술이 중국에 이미 뒤처져 ‘1차 방어선’을 내줬다는 해외 석학의 진단이 나왔다. 중국은 거대언어모델(LLM) 기술에서 미국을 따라잡거나 일부 앞선 데다 반도체 연구에서도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일본이 반도체 등 산업 전반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다가 한국에 기술 우위를 뺏긴 것처럼 한국도 AI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중국을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황승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18일 이정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연 토론회에 화상으로 참여해 “과거 비즈니스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교할 때는 한국이 가격에서는 뒤지지만 품질에서는 앞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품질에서도 중국이 앞설 수 있는 상황”이라며 “이미 1차 방어선은 뚫렸다”고 말했다.
영국 토터스미디어가 집계하는 국가별 AI 역량 순위에서 미국은 지난해 기준 100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중국이 53.88점으로 2위, 한국은 27.26점으로 6위다. 중국 ‘딥시크’가 등장하기 이전 지표라 올해는 중국이 크게 올라설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연구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분야에서 가장 큰 규모인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중국은 2023년부터 미국과 한국을 앞지르고 가장 많은 논문을 발표한 국가로 올라섰다. 중국이 발표한 논문은 올해 집계 기준 92건으로, 미국(55건)과 한국(44건)을 합친 숫자와 맞먹는다.
이우근 칭화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추격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중국의 시스템반도체가 무섭게 약진하고 있다.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만 3500여개로, 한국의 10배가 넘는다”며 “중국은 내수시장이 크기 때문에 수많은 회로 전문 설계회사가 있고, 투자 규모도 엄청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엔 회사가 도산하기도 했지만 다시 창업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서서히 체질이 개선되고, 산업적 측면에서 큰 기초체력이 되고 있다”며 “이런 현상을 보다 보면 일본이 아날로그를 고집하다 한국에 뒤처진 것처럼 AI 시대에서는 중국이 한국을 추격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밝혔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의 인재 양성과 제도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황 교수는 “전 세계에서 LLM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11명은 모두 과학자다. 이제는 과학자가 아니면 신기술을 이뤄낼 수 없는 시대”라며 “대부분 과학자가 머무는 실리콘밸리는 규제가 느슨해 벤처캐피털이 활발하게 투자할 수 있다. 제도를 잘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칭화대는 반도체 관리 석사과정과 기업인 파트타임 박사과정을 운영해 다양한 방면에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며 “한국도 국내외 전문인력을 양성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글로벌 스타 엔지니어’를 탄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