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난과 무지의 땅 조선에 복음의 발길을 내디딘 지 140년이 됐다. 내한 선교 140주년을 맞으며 필자에게 생각나는 기억이 하나 있다. 필자가 미국의 신학교에서 유학할 때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제3세계에서 온 유학생들과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국에 들어왔던 첫 선교사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신학생들이 내한 선교사들에 가진 이미지와 많이 달라 의아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수긍이 갔다. 그들의 눈에는 자기 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유럽의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와 본국을 식민지화하고 경제침략을 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었다.
반면 내한 선교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 내한 선교사들은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에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독립운동의 지지대 역할을 해주며 고통받는 한국 백성들 편에 서주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인식은 초기 한국 기독교가 이른 시간에 백성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양코배기의 종교’가 아닌 민족의 애환과 함께하는 종교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내한 초기 선교사들의 행보는 사회 한복판에서 교회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사회 한복판에 있으면서, 그 사회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 공동선(Common good)을 이루는 데 이바지할 때 그 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선교적 발판을 확보하게 하여 세대가 지나면서 그 사회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를 많아지게 한다. 교회가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사회의 보편적 고통을 치유해 주는 일은 그 사회를 위해서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소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공동선은 어떤 것일까. 소수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고통을 만져주는 일이다. 국가가 감당해야 하지만 손이 미치지 못하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쏟을 때 교회는 그 사회의 공동선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사역을 통해 질병을 치료해 주고, 전염병을 몰아내 주며, 교육사역을 통해 문맹을 몰아내 주고 도덕적 삶을 계몽해 줄 때 이것이 교회가 공동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교회의 공공성(Publicity)이라고 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선교가 정확히 이 궤적을 따라 진행됐다. 내한 선교사들의 선교는 철저히 교회의 복음전파와 사회에서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진행됐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통이 돼 140년 남짓 된 기독교 역사에서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교회 부흥을 가져온 기초가 됐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이 전통은 현대에 와서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우리 사회의 지상과제를 달성하는 데에도 아름답게 빛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도외시하고 공공성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다.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공감할 만한 사회의 아픔을 붙잡고 씨름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특정한 이념과 정치 신념을 옹호하는 데만 과도하게 집착하고, 특정 정당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견해를 주장할 때, 교회는 이미 공동선을 잊고 한쪽 편에 서 버린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슬퍼하실 일이다.
교회가 중심을 잃고 편당성을 갖게 될 때 사회에는 정말 치명적이다. 그 사회의 도덕적 균형자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편당적 이권과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따라 세상에 기준과 잣대를 제공해 줄 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엄청난 혼란은 공동선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내한 선교 140주년을 맞아 초기 선교사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세웠던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재확립하기 위해 환골탈태의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