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올곧은 것이라곤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이마누엘 칸트)
우리와 같이 숨을 쉬던 사람이 영원히 그 숨을 쉬지 않게 됐을 때 의사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나쁜 소식을 전하는 순간은, 특히 그 순간을 처음 겪게 된다면 의사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는다.
의사가 수술에 집중하다 보면 수술포에 덮인 얼굴이 어떤 사람인지 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수술이 끝나고 환자 소식을 전할 때 마주하는 가족들의 얼굴에서 수술포 아래의 얼굴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전공의 시절 교통사고로 심장의 반이 찢어진 환자를 수술한 적이 있다. 우리는 쏟아지는 출혈을 막아내지 못했고 환자는 살아서 수술실을 나오지 못했다. 이런 경우를 테이블 데스(table death·수술 중 사망)라고 부른다. 나는 나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문을 열고 보호자 대기실로 나갔다.
내가 열었지만 문은 갑자기 열린 듯했다. 사람들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제히 일어섰다. 모든 눈이 내 얼굴을 향했다. 절실한 마음들이 의사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준비 자세. 그게 환자의 가족과 의사가 만나는 방식이었다. 이제 내가 말해야 할 차례였다. “사망하셨습니다.”
내가 허공에 뱉어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어떤 힘에 당겨진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음이 던져버린 물건처럼, 툭 떨어지는 사물처럼, 마치 내 말에 갑자기 중력을 느껴버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말의 무게가 아니라 말이 불러온 중력 때문에. 혈연, 우정, 기억에 이끌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신을 불러냈던 힘이 이제 사라진 것을 느꼈다. 사망한 환자의 어머니는 자기 몸은 자신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이 지탱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내 말이 떠 있던 허공을 향해 대답처럼 오열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빼앗아가버린 어떤 것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켰지만 잠시도 못 버티고 다시 쓰러졌다. 어머니가 서 있기 위해서는 다른 게 필요해 보였다.
내 뒤에 문은 닫혔고 나는 죽음이 불러온 정서가 가득한 그 공간에 한참 갇혀 있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한 장면이 갖는 의미가 수년의 경험과 맞먹는 경우가 있다.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의미들 속에, 더 단단해지기 위한 초보의사의 담금질처럼 깊이 잠겨 있었다.
나는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라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중력을 생각했다. 우리를 당기는 힘이 아니라 우리를 당기는 중력에 대해 ‘버티는 힘’을 통해 발밑 거대한 지구의 힘을 느꼈다. 그로 인해 지구의 힘에 맞서 우리를 서 있게 하는 존재를 생각했다. 내가 쓰러지지 않게 해주는 그런 사람을 느꼈다.
대기실 공간에는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을 의지해 땅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장면만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서 있었나”라는 질문은 그동안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사람들은 이제 몸뿐 아니라 삶조차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지탱하는 것은 곧 신체를 지탱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기댄다는 게 비유를 넘어 말 그대로 그 사람을 버팀목으로 땅 위에 서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철학자가 간파했던 태생적 인간의 한계와 때론 겸손을 가르치는 비유였던 “인간은 뒤틀린 목재다”라는 말. 하지만 뒤틀린 목재일지라도 태어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버팀목이 된다. 그러니 한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는 쓰러진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중력을 버티고, 또 그렇게 세상을 버티며 살아간다. 버팀목 덕분에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의사는 그 버팀목을 지켜내는 사람이고 또 버팀목이기도 하다. 비록 조금 뒤틀려 있을지라도.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