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입력 2025-03-19 00:34

“눈높이 낮춰 직장 구하라”
취업 못한 젊은이 향한 폭력
통계 벗어나야 대안 보인다

최근 취업 통계에서 다소 걱정스러운 지표가 공개됐다. 통계를 보기 겁나는 경우가 이런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취업을 준비 중이거나 집에서 그냥 쉬는 ‘청년 백수’들이 지난 2월 기준 120만명에 달한 것이다.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이거나,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 혹은 ‘취업준비자’인 청년의 수까지 합산하면 120만7000명. 청년 4명 중 1명이 불안정 고용 상태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필자에게도 청년 취업 문제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필자가 선 강단 앞 학생 대다수의 고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업이란 단어는 어떻게 봐도 부정적이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의미인 실업은 인간이 가진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근로조건의 박탈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부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는 실업을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당면 과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당연한 말이다. 일자리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도 크겠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빈곤으로 이어지는 지름길도 실업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련의 청년실업을 다루는 정책 방향과 이에 부응하는 사회 분위기, 곧 여론이 가진 시선의 따가움에 관해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청년의 실업을 백수, 혹은 그냥 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그렇다. 여기에 기성세대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포개진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좋은 직장 혹은 남들과 비교할 때 무시받지 않는 직장이나 직업을 갖기 위해 지나치게 까다롭게 취업을 생각한다고 여기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때는 고생도 사서 했어’라는 고루한 생각의 바탕 위에서 청년의 현재를 먹고살 만한 세대의 어리광 정도로 취급하는 목소리도 빈번히 듣게 된다.

과연 청년실업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게 바람직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좀 더 나은 양질의 직장을 찾아 취업을 준비하는 건 모든 세대가 가진 공통의 목표다. 취업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눈높이를 낮춰 어떤 곳이라도 좋으니 우선 취업만 하라는 식의 주문은 꿈과 미래를 가진 당사자가 아니고선 결코 해선 안 될 조언이다.

청년이 그냥 쉬고 있다는 인식에 관해서도 재고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쉰다는 개념을 청년과 결부시킬 때 유독 잣대가 가혹한 편이다. ‘교육 잘 받고, 신체 건강한데 왜 그냥 쉬고 있어. 무슨 일이라도 하지’라는 편견 가득한 전제가 작동하는 걸 보게 되는데, 청년이 쉰다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청년의 쉼은 사회를 향한 두려움의 퇴적일 수 있으며, 이른바 보통의 삶이 강요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거란 불안에서 비롯된 정서적 피로일 수도 있다. 청년이 그냥 쉰다는 말에 쓰인 ‘그냥’이란 부사는 지극히 편견에 사로잡힌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이든 어르신이든 실업은 복잡하게 얽힌 고차방정식이기에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 청년의 취업 기준을 4대 보험 직장 가입의 경우에만 한정해 바라보는 태도, 반대로 어떻게든 통계에 취업자로 잡히기만 하면 된다는 접근 또한 지양해야 할 부적절한 인식이다. 청년이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기준, 더 나아가 일을 하고 있다는 기준을 통계상으로 잡히는 기준에만 매달리는 건 실업을 바라보는 태도의 폭력이다. 일에는 수입이 잡히지 않는 일도 상당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 예술 종사자의 자기 수행에 가까운 잠재적 예술 활동도 일에 포함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을 벌지 않는 청년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 세대로 인식하는 게 팽배한 이상 앞서 집계된 120만명의 청년이 그냥 쉬는 통계상의 위협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의 실업 문제를 한두 가지 요인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솔직한 인정과 더불어 실업의 관점을 눈에 보이는 통계에만 의존하는 획일적인 인식의 전환 말이다. 그 인식 전환이 선행될 때 문제 해결의 대안 모색 역시 활발해질 것이다.

주원규(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