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손잡는 제약, 끌어당긴 신약

입력 2025-03-18 23:05
게티이미지뱅크

“방대한 유전자 데이터에서 약물과 질병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인공지능(AI)에는 쉬운 일입니다.”

산업 전반에서 영역을 넓히고 있는 AI는 이미 제약 산업에도 신약 개발의 속도와 정교함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AI의 계산 능력과 데이터 처리 기술을 활용해 질병에 대한 패턴을 읽고 신약 후보 물질을 가상으로 합성해 연구개발 효율과 성과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신약 발굴 과정은 막대한 비용이 들고 개발 기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AI는 비효율을 줄여 생산성을 높이고 실패율을 낮출 수도 있다. 18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신약 개발에 평균 15년의 시간과 3조원의 비용이 필요한데 AI의 도입으로 이를 7년과 6000억원 규모로 줄일 수 있다.

AI 도입의 경제 효과를 일찌감치 알아본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 기업)들은 AI 도입 영역을 넓히기 위해 서둘러 빅테크와의 협업에 나섰다. 맥킨지글로벌연구소는 제약산업에서 생성형 AI가 90조~160조원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제약사들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통해 AI를 신약 개발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는 염증성 질환에 대한 치료법을 개발하고 기존 약물의 새 용도를 발굴하기 위해 AI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 일라이릴리도 AI 기반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통해 신약후보 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영국 화이자는 지난해 AI 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엔비디아 출신의 베르타 로드리게스를 AI 최고 책임자로 선임하는 등 관련 조직 강화에 나섰다.

AI는 임상 시험에서 속도를 높이고 환자 안전을 살피는 데도 긴요하게 쓰인다. 제약사들은 AI를 통해 환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장 적합한 환자군을 선별해 임상 시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신약 후보 물질의 임상 일정은 평균 7~9년이 걸리지만 AI를 도입하면 3~5년 정도로 단축할 수 있다는 게 업계 관측이다.

비만약 ‘위고비’ 개발사인 덴마크 노보 노디스크는 AI를 사용해 임상 시험에 적합한 환자를 정확하게 선별해 빠르고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AI 협력 접점을 넓혀가고 있는 스위스 노바티스 역시 실시간으로 환자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부작용을 조기 발견하는 데 AI를 이용하고 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따르면 임상시험에서 AI가 실험 약물의 표적 질환을 발견하는 등 실제 역할을 한 사례가 2021년 27건에서 2023년 최소 67건으로 증가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을 비롯한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도 어려운 대내외적 환경에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AI 인재를 등용하고 있다. 막상 AI를 도입했지만 명확한 계획이 없었던 탓에 실제 사업에 활용하고 실질 성과를 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도 상당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AI 관련 투자 계획을 보류하거나 철회하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감지된다. 바이오 업계에 대한 투자 위축으로 1000개의 AI 신약개발 기업이 사라졌다는 얘기도 있다.

국내에선 AI 기술 도입에 법적 규제와 데이터 활용에 관한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신뢰도 높은 의료 데이터를 보유하고도 표준화 미비와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규제로 활용에 제약이 큰 만큼 법적 규제의 허들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계 관계자는 “AI는 제약 산업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이러한 혁신이 더 많은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제공하고 경제적 부담을 낮추며 궁극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훈 기자 hun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