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증오의 고리는 끊을 수 있는가

입력 2025-03-18 00:38

4년 전 대선 불복 선동한 트럼프
美 정치적 분열·증오 심화시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때는
여야 4당 “결정 승복” 공식발표

헌재 불복 정치적 내전 부를 것
어떤 결과든 그대로 받아들여야

2021년 1월 수천 명에 달하는 폭도들이 미국 워싱턴의 의회의사당을 공격했다. 이들은 두 달 전 미 대선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확정 중이던 상하원 합동회의장에 난입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의 승리 결과를 뒤집으려 한 초유의 의사당 침입 사태였다. 임기를 며칠 남겨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직전 집회에서 “우리가 선거에서 이겼다” “도둑질을 멈추게 하라”며 선동했다. 다수의 인명 피해와 민주주의 체제의 심각한 위협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며칠 뒤 하원은 내란 선동 혐의로 트럼프 탄핵소추안을 찬성 232명, 반대 197명으로 통과시켰다. 2024년 11월 대선을 거치면서 다시 트럼프가 당선됐지만 미국 내 정치적 분열과 증오는 더욱 심화됐다. 상대 진영에 대한 극단적인 적개심 표출은 오히려 증폭된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극단으로 향하고 있다. 좌우 양쪽 끝에 서 있는 극단 세력은 “헌재가 딴짓하면 한칼에 날려버린다” “검찰도 내란 공범”이라며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 통합을 이끌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극단적 분열을 부추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는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일부 의원은 삭발도 감행했다. 국민의힘도 친윤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와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 각하를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간다.

수사기관을 향한 이전투구식 고발전은 또다른 분열을 야기한다. 민주당은 심우정 검찰총장, 국민의힘은 오동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을 각각 고발했다. 특히 공수처는 검찰과의 수사 경쟁, 내란죄 수사권, 체포 및 구속영장 쇼핑 등 고비가 있을 때마다 논란을 자초했다. 과거 정치적 의도로 무리하게 공수처를 도입하고, 미비한 공수처 입법 체계를 그대로 방치한 정치권은 더 큰 책임을 져야 하지만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는 없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헌재 판결에 불복하며 대규모 폭력 사태가 빚어질 가능성이다. 8년 전인 2017년 3월 헌재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한국 사회에선 심각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헌재는 당시 박 대통령 탄핵을 인용하면서 국론 분열을 종식하고 화합과 치유의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했으나 사회적 혼란은 상당 기간 계속됐다.

당시 여야 4당 원내대표는 탄핵심판 선고 한 달 전 헌재의 판단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함께 발표했다. 8년이 지난 현재 여야는 승복을 거론하면서도 승복에 대한 상대방의 진정성을 문제삼고 있다. 여야가 지금 보여주는 행위는 불복을 예고한 것과 다르지 않다.

비상계엄 해제를 통해 민주주의의 신속한 복원력을 보였던 우리 사회는 탄핵심판 결정을 앞두고 다시 기로에 섰다. 헌재가 대통령 파면을 선고할 경우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따라 곧바로 조기 대선이 이어진다. 그러나 조기 대선 국면에서도 극단적 분열을 부추기는 증오의 정치가 이어진다면 비극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건 자명하다. 분열을 극복하지 않고 대선을 치른다면 결과적으로 또다른 실패한 정권만 창출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치학자 바버라 월터는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서 민주주의는 최고의 사회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 위기가 닥쳐도 곧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미 의회 난입 사태에서 보듯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는 현재 많은 국가들이 독재와 민주주의의 중간인 ‘아노크라시(anocracy)’ 상태이며, 내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봤다. 그는 아노크라시에선 팬덤의 공고한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가짜 정보를 활용해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지지 세력을 선동한다고 했다. 월터의 지적은 4년여 전 미국 상황에 기초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현실에 그대로 투영된다.

극단적인 분열은 반드시 종식돼야 한다. 특히 헌재 판결에 대한 불복은 심각한 정치적 내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책임과 그 의무는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오롯이 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갈라진다면 그 대가는 우리 미래세대가 두고두고 치를 것이다. 증오의 고리는 지금 세대에서 끊어내야 한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